생각속에 갇히게 하는 <행복한 라짜로> 비평

스틸= 행복한 라짜로

<행복한 라짜로>가 벌써 개봉 9주차를 넘기면서 두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나면서 장기 상영 중에 있다. 지금은 여러 플랫폼을 통해서 VOD서비스로도 받아볼 수 있고 아직 극장 상영이 종료되지 않았기에 서두르면 큰 스크린에서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아직 남아있다.

또한 이 영화를 관람하신 분이나 아직 관람을 하지 않은 분들에게 약간의 도움이 될듯하여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를 처음보고 글을 쓴 박정수님의 영화에 대한 비평글을 올려본다. 영화는 보는 관람객 분들의 관점에 따라서 각기 다른 시선으로 영화를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박정수님의 영화적 관점과 비평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영화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기에, 이러한 견해 차이를 감안하고 본다면 매우 훌륭한 영화비평 글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신 관객 분들의 주관적인 시선과 해석에 방해가 되지 않은 선에서 영화를 다시 생각해보고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보고자 하는 마음과 영화비평에 대해서 한번쯤 진중하게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영화 수입사 대표 박상백)

스틸 컷= 행복한 라짜로

[무비톡 박정수 평론가] 앨리스 로르와처는 이탈리아의 떠오르는 샛별과도 같은 시네아티스트다. 그녀는 배우로서 이탈리아를 뛰어넘어 여러 유럽국가의 러브콜을 받는 자매 알바 로르와처와 함께 동시대 이탈리아 영화계에서 주목받아야 할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알바 로르와처가 <아이 엠 러브>, <헝그리 하츠> 등으로 국내 관객들에게 소개된 것과는 달리, 알바 로르와처의 작품은 한국에서는 단편적으로만 소개되었다.

그녀의 장편 데뷔작 <천상의 육체>는 작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이탈리아 영화의 동시대 경향을 드러내는 특별전에서 소개되었고, 2014년도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더 원더스>의 경우 그 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만이 소개되었을 뿐이다. 이렇듯 국내에 미온적으로 알려진 그녀의 작품 세계를 살펴보자면 우선 네오리얼리즘을 계승한다는 측면을 꼽을 수 있다.

그녀는 비전문배우들의 기용과 일상적이고 느슨한 서사, 토스카나의 전원 등 이탈리아의 중심부에서 멀어진 세계를 포착하며 전통적인 사조를 계승한다. 한편 이러한 리얼리즘을 아직 세상의 떼가 묻지 않은 어린 유년기의 시선에서 전개한다는 점과, 마술적 리얼리즘에 가까운 환상적인 상징들을 사용하여, 네오리얼리즘을 그녀만의 독창적인 시선으로 변주하며 계승한다는 점에서 그녀의 고유한 색채를 구획 지을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유년기 기억들을 엮어내어 보다 자전적인 영화를 풀어내고, 집시나 에트루리아의 민속 등 이탈리아의 다양한 민족적 정체성들이 공존하는 화합의 세계를 풀어낸다는 점을 그녀의 작품세계로 꼽을 수 있다. 이러한 그녀의 색채는 신작 <행복한 라짜로>에서도 이어진다.

우선 그녀가 줄곧 추구하던 16mm필름을 결코 포기하지 않은 채, 본 작품에서도 그레인들이 자글거리는 필름의 질감으로 그녀가 담아내고자 하는 세계가 포착된다. 동시대 영화에 디지털 기술의 진보가 내린 축복이라면 이를 통한 제작비의 절감과, 보다 효율적인 제작과정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필름시대를 거쳐 간 아녜스 바르다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서슴없이 <텐>을 통해 디지털 촬영에 대한 긍정을 표한 것처럼 말이다. 허나 로르와처는 데뷔작부터 끈질기게 필름을 고수한다. 작금에 필름이라는 매체성은 과거에 상응한다. 더 이상 현대적이지 않다. 무엇보다 디지털 촬영보다 불완전하고 매끄럽지 못한 유한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로르와처가 필름을 고수하는 바를 이러한 매체성에서 추측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언제나 과거를 담아내는 매체다. 동시대를 포착할 수는 있어도 지금 바로 여기를 포착할 수는 없다. 그러한 과거지향적인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을 필름이라는 형식으로 드러내며, 더욱이 그녀는 자신의 과거에서 비롯한 자전적인 기억을 담아내는 영화들을 연출한다.

이러한 그녀의 유년시절 추억들의 흐릿함, 서서히 상실되어가는 유한성, 파편적으로 산재하는 기억의 특성들이 필름의 불완전성 및 자글거리는 거친 매체성과 상응시킬 수 있을 테다. 이러한 필름의 매체성과 더불어 영화는 둥근 모서리의 프레임을 지향한다. 리산드로 알론소의 <도원경>이나 라드 주드의 <상처 입은 마음>과 유사한 이러한 둥근 모서리의 프레임이지만, 한껏 정돈된 이들의 모서리보다 더욱 거칠고 투박하다.

스틸 컷= 행복한 라짜로

전자의 감독들은 영화라는 매체와 가상성을 환기시키기 위해 둥근 프레임을 사용한다고 할 수 있지만, 그녀는 가상성보다도 초기영화 시기의 과거에 상응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라짜로는 거의 언제나 중앙구도에 놓이며 강조된다. 한편 여러 인물들이 산재되어 포착되는 공동체를 포착하는 구도는 대단히 산만한데, 이렇게 구획되지 않고 마구 뒤엉킨 구성 속에서 일상을 보는듯한 리얼리즘을 구현한다.

한편 이러한 산만한 구도는 전원의 인물들을 포착하는 데만 사용되어, 부르주아지를 포착하는 데선 한껏 정돈되고 딱딱한 이미지들이 강조된다. 영화의 리얼리즘은 핸드 헬드를 통해서 구축되며, 보다 현실의 인물들이 보일 수 있는 시점을 통해서 포착된다. 크레인 숏에서 드러난 하이 앵글 구도 또한 실제로 그들 삶에 공권력이 개입하며 생성된 시점이기에, 영화 속 거의 모든 숏들은 일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네오리얼리즘 기수들이 비추곤 했던 투박하고 거친 전원의 건물들이 포착되고, 그리고 한껏 자연광이 내리쬐는 인비올라타의 탁 트인 자연을 예찬한다. 전원의 농부들을 포착하는 그녀의 카메라는 마치 밀레가 농촌을 묘사한 작품들을 보듯, 그들의 노동에 대한 예찬으로 가득하다. 이러한 전원 속에서 포착되는 정보들은 전력도 열악하고, 전파도 잘 터지지 않는 고립된 지역이라는 바다.

그리고 여전히 약혼전야의 축제가 벌어지는 정신적으로 전통이 강조되는 공간이다. 한편 이러한 전원이 고립되어 있기에 후작부인은 오래전에 철폐된 소작농 제도를 부활시켜 그들을 착취한다. 그들은 아무리 노동을 행해도 적자를 면치 못하며, 빚만 늘어나고 노동에서 해방될 수 없다. 아이들이 담뱃잎 사이에 숨어있는 신비로운 이미지, 허나 그것은 은폐와 고립을 연상시킨다.

결코 담배 밭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당대의 상황을 말이다. 마리아그라치아와 주세페의 약혼이후, 그들은 도시로 떠나고자 하지만, 그 또한 독사 같은 후작부인의 허락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이권만을 추구하고자 하는 후작부인의 야욕 속에서, 식민주체에 의한 하위주체들의 노예화가, 즉 역사적 과오가 다시금 수면 위로 부상하며 경각심을 자아낸다.

그리고 이기적인 이권만을 추구하는 지배주체들의 탐욕 속에서, 공공의 이익은 퇴보하고 있다. 라짜로가 목도하는 메마른 강이 이러한 바를 드러낸다. 이러한 영화의 시작은 밤이다. 그들이 어둠 속에 은폐되었다는 것을 비추는 시간임과 동시에, 닭장에서 닭이 뛰쳐나오며 어둠 속에서 헤어 나오고자 하는 욕망이 암시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칠흑에 둘러싸인 그들을 드러내고 비추는 것은 다름 아닌 라짜로다. 이러한 라짜로는 하위주체들인 소작농들조차 착취하는 인물이다. 하얀 옷을 입고 언제나 지배주체의 요구에 부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가의 미소와 천진함, 그리고 순수함을 잃지 않는다. 아파도 그는 굴하지 않고 내색도 않는다. 그는 보상으로 받는 바를 모두 나눈다.

스틸 컷= 행복한 라짜로

그가 보상으로 받은 커피를 마을 사람들과 나눠도, 때때로 그들은 얄궂게 이를 외면한다. 하지만 라짜로는 이에도 굴하지 않는다. 그는 대단히 수동적인 존재이지만, 한편 그는 어떤 시대의 통념에도 얽매이지 않고, 역설적으로 이데올로기의 구속으로부터는 자유롭다. 이러한 라짜로의 용모와 특히 포스터의 디자인은, 로코코 시대의 이단아에 다름 아닌 앙투안 와토의 <피에로 질>을 연상케 한다.

로코코 시대의 우아하고 향락적인 향연을 담아낸 페트 갈랑트, 허나 <피에로 질>은 그러한 페트 갈랑트의 이면을 포착했다. 귀족들의 향연에 의해 수동적으로 희생되어 대단히 음울한 질의 심리를 포착하였다. 지배주체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하위주체들의 운명을 말이다. 이러한 <피에로 질>을 로르와처 감독은 모티브로 삼고 있는 것만 같다.

라짜로가 서있는 포즈와 유사한 용모를 통해서 말이다. 허나 라짜로는 결코 불행하지 않다. 지배주체로부터 구속은 받되,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불행하지 않은 걸까? 아직까지 라짜로는 대단히 신비로운 존재다. 라짜로와 전원의 농민들이 포착된 이후에, 부르주아지의 위선이 까발려진다.

부르주아지의 혈육이면서도, 그 정신에 동참하지 않는 모순적인 존재인 반항아 탕크레디의 발화를 통해서, 그리고 후작부인이 아이들을 향한 교육을 통해서 그들의 가면을 벗겨낸다. 본 극에서 강조되는 바는 종교다. 믿음을 지니고 그 바를 지키기 위해서 탄압 당하더라도 무던히 버티라는 카톨릭의 교리가 강조되고, 전원의 인물들은 이러한 종교를 믿고 있다.

본 극의 제목이자 인물의 이름이기도 한 라짜로 또한, 그리스도가 기적을 행해 무덤에서 부활시킨 라자로의 변형이다. 이렇게 가득한 본 극의 종교성, 허나 그러한 종교를 누가 교육하는가, 이는 다름 아닌 후작 부인이다. 후작부인의 믿음은 곧 자신에게로의 충성에 상응하고, 이 믿음을 어떠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말라는 바가 그녀가 바라는 종교의 주목적이다.

허나 지배주체들은 이러한 카톨릭을 숭배하지 않는다. 후작부인은 종교적으로 거리가 먼 방탕한 인물로, 탕크레디의 출생조차 투명하지 않다. 이렇게 종교가 하위주체들이 스테레오타입으로 행동해야 할 바를 규정하고, 이를 통해서 지배주체들의 이익을 누리는 과정을 통해, 서구 열강들이 비서구들을 향해 가했던 식민정책이 엿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담배사업을 하는데, 이러한 담배사업은 이내 곧 탕크레디를 위협한다. 그는 호흡기 질환을 앓고 있는 것으로 암시되는데, 이는 곧 그들의 자멸을 암시하는 것이리라. 허나 탕크레디는 그러한 자멸의 운명에 쉬이 순응하지 않는다. 그는 태생부터 투명하지 않은, 기성 이데올로기의 모순을 목도한 자요, 그 자신이 균열을 일으키는 자다.

이러한 탕크레디는 그 이데올로기의 균열과 모순을 까발려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자다. 이데올로기를 지배하는 백작부인과 이에 무비판적으로 세뇌되고 순응해버린 농부들은, 균열을 은폐하기에 급급하거나 균열을 마주하지 못해 혁명을 일으키지 못한다. 균열을 포착하는 유일한 이로서 탕크레디가 함께하는 것은 순수한 힘에 다름 아닌 라짜로다.

어떠한 종교에도, 사회 통념에도 자유로운 아주 순수한 라짜로는, 지배주체들의 모든 요구에도 꿋꿋하게 버텨나가는 강한 의지와 힘을 지녔다. 그러한 고된 노동에도 지치지 않는 강인함, 그리고 어떤 이데올로기의 편도 들지 않는 순수함을 지닌 라짜로와, 탕크레디의 혁명의지가 결합한 것이다. 이후 사법체계가 그 현장을 목도하고, 후작부인의 만행이 만천하에 폭로된다.

소작농들을 구속하던 한 시대가 저물었다. 한편 라짜로는 이후 추락한다. 그리고 그 주위에 늑대가 현현한다. 라짜로가 추락하는 시퀀스에서 동물과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성자의 이야기를 하는 안토니아의 나레이션이 울려 퍼진다. 라짜로가 선인이라는 측면보다도, 주민들이 종교에 다름 아닌 성인에 착취당하지 않고, 역으로 착취하였다는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

스틸 컷= 행복한 라짜로

성인이자 종교로서 라짜로는 언제나 착취당하는 존재, 그들이 의존할 수 있는 존재다. 이러한 바는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으로 추측된다. 구형 핸드폰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토대로 말이다. 이후 시대는 흘러가 동시대의 도시로 넘어온다. 하지만 동시대에도 변한 것은 없어 보인다.

노동법과 최저임금이 마땅히 보장되어야 할 도시지만, 정치권력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는 여전히 불법적인 저임금 노동착취가 포착된다. 그리고 소작농의 신분에서 벗어난 이들이고 보상을 받아 마땅한 이들이지만, 그들은 어떠한 보상을 누리지 못한 듯, 도시의 중심부 바깥에서 암담하게 생을 영위해나간다.

고립된 전원은 중심부의 시선에서 벗어난 도시, 또는 백작부인과 별 다를 바 없는 중심부가 외면하는 도시로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리고 탕크레디의 경우 중앙은행에 의해 자신의 자본을 저당 잡혔다는 바가 암시된다. 비록 이탈리아 외부에서 일어난 바이지만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연상케도 한다.

국가의 통제 없이 폭주하던 시장 속에서, 부는 소수권력에게 집중되고, 여전히 노동계층은 고통 받는다. 영화는 도시로 시선을 옮기면서도, 여전히 이념으로부터 거대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고통 받는 시민들의 삶을 포착하는 시선에 있어선 동일하다.

또한 후작 일가의 자본이 회수된 것은 좋지만, 그 땅과 자본은 왜 착취당하던 노동자들에게 분배되지 않고 은행이 저당잡고 있는가? 국가는 후작부인의 착취를 대사기극이라 표현함에도, 과연 피해 입은 노동자들에게 마땅한 몫을 분배한 것인가. 한편 이러한 바는 벼랑에서 추락하여 마치 사망한 것만 같던 라짜로가 목도한다.

허나 라짜로는 상처 하나 없이 멀끔히 시간이 지나 다시 우뚝 선다. 라자로처럼 부활한 라짜로, 허나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부활한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모두 시간의 풍파를 육체에 새겼지만, 그만은 여전히 젊은 초상 그대로이다. 그래서 라짜로의 그 신비는 절대성이라는 측면으로, 그 베일을 벗겨낼 수 있다. 라짜로는 다름 아닌 시간일 것이다.

사람들이 유일하게 착취해도 되는 <피에로 질>은 시간에 다름 아닐 것이다. 시간은 우리가 아무리 착취해도 불평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착취된 시간은 행복하다. 그리고 혁명은 특정한 시간과 결합하여 사건을 발발시키고, 한 시대의 종언을 고한다. 혁명가 탕크레디는 절대적인 시간과 결합한 것이다. 진보에 상응하는 혁명은 시간과 이복형제다.

이러한 라짜로의 행동은 주체적이지 않고, 타인에 의해 움직인다. 인간이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시간이 무의미하고 유의미하게 바뀌듯, 라짜로는 시간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그를 착취하느냐에 달려있다. 소작농들이 착취에도 행복하고 웃음을 잃지 않았던 것은, 이데올로기의 구속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시간을 용이하게 착취했기 때문이다.

탕크레디도 라짜로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웃음을 잃지 않았다. 시간의 착취 속에서 우리는 행복하다. 또한 시간도 행복한 우리에 기쁨을 노래한다. 연인들의 약혼식, 재회에 라짜로는 언제나 악기로 행복과 기쁨을 연주한다. 시간을 착취하며 인류가 띠는 순박한 미소에 절대자 또한 자애로운 웃음으로 화답한다. 이제 안토니아는 카톨릭이 아닌, 그 신비롭고 절대적인 라짜로를 숭배한다.

언제나 우리의 도처에 놓여있고,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시간, 시간이야 말로 동시대의 인류가 숭배하고 의지해야할 절대자에 다름 아니다. 한편 소작농들에 의해 진보를 이루지 못하고 소비된 시간,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일어난 혁명의 시간이나, 누려본 적 없는 자유에 그들은 여전히 인비올라타에서 발을 내딛지 못한다.

니콜라는 소작농들을 경계하였고, 그들에 의해 라짜로의 주변에 기묘한 힘이 감지되는 바람이 불어 닥쳤다. 허나 신혼부부도 혁명 이전에 도시로 나아가지 못했고, 혁명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우연에 의해서, 후작의 소생인 탕크레디를 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발하였다. 혁명은 일어났지만 그것을 누릴 주체들은 막상 부재하고 있다.

그들은 줄곧 울음으로 늑대를 불러들였고 이에 착취하지 못한다. 또한 라짜로가 열병을 앓음에도 그를 뉘일 자리 없다는 농민들의 냉담함에 라짜로는 기력이 쇠하여 추락한다. 그렇다면 이후 라짜로가 추락하여 행동할 수 없는 시간에 현현한 늑대는 무엇인가, 그것은 야만의 시간이자 우리가 착취할 수 없는 시간이다. 그래서 라짜로와 늑대는 시간의 두 얼굴을 보여준다.

라짜로는 양들이 지내는 동굴형 외양간 옆에 거주하며, 마치 양치기 및 양치기견을 연상케 한다. 이러한 라짜로의 시간은 주인에게 순종하는 개에 상응하는 낮의 시간, 늑대의 시간은 인류를 위협하는 밤의 시간이다. 그래서 교회 미사시간의 종교음악이 라짜로에게 옮겨오는 것은, 라짜로야 말로 절대자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역설한다.

교회에서 특정 교인들만을 위한 배타적인 종교를 보여주는 것과 달리, 라짜로는 만인에게 열려있다. 이러한 라짜로와 늑대의 신비로운 상징성들을 통해서, 감독은 마술적 리얼리즘을 선보인다. <더 원더스>에서도 시간에 대한 탐구가 신비롭게 상징된 바 있듯, 감독의 초자연적인 상징은 여전히 시간을 드러낸다. 한편 혁명도 시간이 지나면 곧 기성의 것이 된다.

그리고 라짜로가 부재한 시간 동안, 혁명은 지속되지 않았다. 혁명가는 쇠락했고 소작농에서 자유인이 된 그들이지만, 여전히 빈곤하긴 마찬가지며 백작부인의 세뇌에 지배당한 그들의 사고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자유인이 된 농민들은 그들이 당했던 ‘사기’를 답습하며 겨우 연명하며, 인비올라타로 돌아가길 열망한다.

라짜로는 과거를 품고 있지만 시간으로써, 과거로 역향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절대자는 과거로 회귀하고자하는 그들의 일대기에 동참하지 못한다. 다만 역향하길 바라는 농민들의 군상에 라짜로는 처음으로 눈물 흘릴 뿐이다. 그래서 라짜로는 은행으로 향해 친구들의 바람을 이뤄주고자 한다. 허나 그의 곁엔 낡은 새총과, 바래선 안 될 이전 시대의 정신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한 혁명의지 및 이데올로기의 모순과 균열을 마주하는 시선이 부재한 채, 시민들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부조리와 마주하지 못하며 숭고한 힘의 흐름을 거부한다. 그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부조리한 권력을 지켜내려 한다. 그래서 그들을 비호하기 위해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 도래한 라짜로에게는 변화를 촉발시킬 목적이 부재하고, 착취되지 못한 시간은 사람들에 의해 다시금 사망한다. 그리고 늑대가 현현한다.

사람들 곁에 있지 아니한 야만의 시간이 다시금 도래한 것이다. 늑대는 도시로 향하는 대로변의 차들과 역향을 띠고 사람들로부터 멀어져간다. 부활 이후 사람들을 향해 자연히 다가가던 라짜로와 대비를 이룬다. 사람들은 더 이상 혁명을 바라지 않고, 오히려 그릇된 바람으로 시대가 퇴보하고 있다는 동시대에 대한 냉엄한 진단으로 본 극은 마무리된다.

이렇게 본 극은 고전적인 매체와 연출을 지향한다. 초기영화 시대의 매체성과 40년대 태동한 네오 리얼리즘의 정신을 계승하여 말이다. 한편 그것에 신비로운 상징들을 섞어내어 자신만의 독특한 변주를 해낸다. 이러한 연출로 포착되는 바는 동시대지만, 이러한 과거의 연출들을 통해서 우리가 동시대라 규정하는 바도 결국에는 과거임을, 지금 바로 여기는 영화로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렇게 포착된 동시대는 여러 반성을 자아낸다. 서구열강들이 식민주의를 통해서 비서구 국가들을 착취했던 역사, 이러한 야만이 동시대에도 다른 얼굴을 띤 채 자행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라짜로의 죽음을 통해서 ‘행복한 시간’이 저물고 있음을 강조한다. 행복한 개의 시간이 잔혹한 늑대의 시간으로 뒤바뀌는 것은 라짜로의 몫이 아닌 우리의 몫이다.

라짜로는 많은 도움을 주지만 오프닝 시퀀스에서 늑대가 닭장을 습격한 것으로 언급된, 늑대의 시간이 도래하는 것을 막진 못했다. 탕크레디가 염원하는 햇볕이 가려지지 않는 개의 시간을 수호하는 것은 라짜로가 아닌 인류의 몫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개의 시간을 지켜내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시간을 착취하고 있는가? 우리는 시간을 착취하지 못한 채, 시대가 야만으로 퇴보하게 그저 손 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다시금 라짜로를 숭배하고 착취해야만 한다. 그 착취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타인을 지배하거나, 이데올로기에 세뇌 및 지배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부조리함과 균열에 끊임없이 맞설 수 있는 비판적인 사고를 갖추고, 이에 시간의 힘을 빌려 혁명을 이룩해야 할 것이다. 그 이후에도 우리는 진취적이었던 그날의 정신을 망각해선 안 되리라. 우리에게 순종적인 개로서 라짜로는 여전히 착취를 갈망하며 ‘원래’부터 존재했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며, 또한 절대적인 존재로서 언제나 스스로 부활할 수 있다. 허나 착취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늑대의 모습을 띠리니, 그 늑대는 우리를 야만의 시대로 인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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