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별세, '세계경영' 상징 지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별세, '세계경영' 상징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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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12.10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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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대우세계경영연구회)= 고(故)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뉴스1

지난 9일 향년 83세로 별세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세계경영'을 내세우며 한국 기업의 해외 진출 최선봉에 서 왔던 기업인으로 평가 받는다. 김 전 회장은 1967년 자본금 500만원으로 대우실업을 창업한 이후 1997년 IMF 사태 이후 급격한 내리막길을 걷기까지 약 30여 년간 승승장구하며 재계에 '대우신화'를 써내려갔다.

10일 대우세계경영연구회에 따르면 김 전 회장은 1936년 12월19일 대구에서 아버지 김용하와 어머니 전인향씨 슬하 5남 1녀 중 4남으로 출생했다. 한국전쟁(6.25전쟁) 중 부친이 납북되면서 어린 나이에 홀어머니와 함께 가족의 생계를 돌보는 어려운 형편에도 고학으로 경기고, 연세대학교 상경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60년 중견 무역업체인 한성실업에 입사한 그는 1963년 국내 최초로 섬유제품 직수출을 성사시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후 김 회장은 31세 때인 1967년 대우실업을 창업하며 사업가의 길을 걷는다. 그가 창업한 대우실업은 1969년 한국 기업 중에서는 처음으로 호주 시드니에 해외지사를 설립했고, 정부의 수출 확대 정책에 발맞춰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미국 등에 의류 및 원단을 수출하며 빠르게 시장을 넓혔다. 

사진제공( 대우세계경영연구회)=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4억달러 달성 수출탑을 받고 있다. © 뉴스1

1975년 한국의 종합상사시대를 연 이후 1976년에는 한국기계, 1978년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 대한조선공사 옥포조선소(대우조선해양) 등의 부실기업을 인수, 단기간 내 경영정상화를 이뤄 한국의 중화학산업화를 선도했다. 같은 시기 에콰도르(1976년)에 이어, 수단(1977년), 리비아(1978년) 등 아프리카 시장진출을 통해 해외사업의 기반을 다졌다.

1978년 대우실업은 국내 기업 중 수출 1위를 달성하는 등 수출 최전선에서 활약으로 빠르게 성장하며 신흥재벌로 주목받았다. 1982년 주식회사 ㈜대우를 설립하며 재계 4위에 총수에 오른 그는 1983년 대우자동차 출범, 대우전자의 대한전선 가전사업부 흡수와 대우통신 설립,

1984년 대우경제연구소 설립, 1986년 대우증권 런던사무소 개설, 경남기업 계열 편입, 1988년 ㈜대우 동베를린지사 설치, 프랑스 롱위전자레인지 공장 건립, 대우증권 홍콩사무소 개설 등 자동차·중공업·조선·전자·통신·정보시스템·금융·호텔·서비스 등 전 산업의 세계진출을 본격화했다. 

사진제공(대우세계경영연구회)=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1997년즈음 루마니아 만길리아 조선소 사업장을 점검하기 위해 항공기에서 내려 공항에 들어서고 있다. 뉴스1

1983년에는 국제상업회의소에서 3년마다 수여하는 이른바 '기업인의 노벨상'인 국제기업인상을 아시아 기업인 최초로 수상했다. 1989년 출간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6개월 만에 100만 부를 돌파하며 최단기 밀리언셀러 기네스 기록을 달성해 세간에 화제가 됐고, 1992년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고려할 정도로 대중의 인지도도 높았다.

부인 정희자씨와 사이에 2남 1녀를 그는 1990년 가장 아끼던 장남 선재씨를 교통사고로 잃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1998년 대우그룹을 재계 2위로까지 성장시켰다. 1999년 해체 직전, 대우는 41개 계열사와 600여 개의 해외법인·지사망, 국내 10만명, 해외 25만명의 고용인력을 토대로 해외 21개 전략국가에서 현지화 기반을 닦고 있었다. 당시 자산총액은 76조7000억원, 매출은 91조원(1998년)에 달했다.

그러나 1997년 불어닥친 외환위기의 파고를 끝내 넘지 못하며 대우그룹 해체와 함께 그도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IMF(국제구제금융)의 고금리 정책과 금융기업 구조조정, 회사채 발행 제한조치 등으로 대우는 극심한 유동성 압박에 시달렸고, 결국 자본잠식 상태에 빠진 끝에 1998년 12월 41개 계열사 중 10개사를 감축하는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하고, 삼성과 빅딜도 추진했지만 실패했다. 

사진제공(대우세계경영연구회)= 대우자동차의 소형승용차 티코와 함께 한 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뉴스1

1999년 8월에는 대우마저 워크아웃을 신청하면서 사실상 그룹이 해체됐고, 그해 11월 김 회장은 회장직에서 사퇴했다. 세계경제포럼(WEF)의 자문위원 중 유일한 아시아인이었던 김 회장은 외환위기 와중에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맡아 경상수지 연 500억달러 흑자 달성, 금모으기운동 등 경제 회생을 위해 노력했다.

2010년부터 마지막 봉사라 여기며 GYBM(Global Young Business Manager) 양성사업에 매진, 베트남, 미얀마, 인도네시아, 태국 등 동남아시아 4개국에 1000여명의 청년사업가를 배출하기도 했다. 이후 분식회계 및 횡령 등의 혐의를 받은 그는 검찰의 수사를 피하기 위해 출국해 약 5년 8개월간 도피 생활을 하다 2005년 입국해 검찰 조사를 받았다.

2006년 11월 열린 항소심에서 분식회계 및 사기대출, 횡령 및 국외 재산 도피 혐의로 징역 8년6개월,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9253억원을 선고받았고 상고를 포기해 확정됐다. 2007년 말 대통령 특사로 사면을 받은 뒤 베트남 등 해외에서 주로 거주해왔다.

그는 2014년 출간한 '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김우중과의 대화'라는 회고록에서 대우그룹이 해체의 길을 걸을 당시 정부 고위 관료들과의 불화를 언급하며 그룹의 해체가 김대중 정부의 의도 아래 진행됐다는 취지의 주장을 해 논란을 일으켰다. 

사진제공(대우세계경영연구회)=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뉴스1

그는 회고록에서 유동성 문제에 대해 "대우에 무슨 큰 문제가 있어서 갑자기 단기차입금을 늘린 게 아니며, 제일 문제가 된 것은 수출 관련 금융이 막혔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수출 금융이 막혀서 할 수 없이 단자, 회사채로 돈을 빌려야 했는데 금융시스템이 정상이었으면 빌릴 필요가 없었던 돈"이라고도 했다.

김 회장은 이 같은 영욕의 세월을 뒤로하고 9일 오후 11시50분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영면에 들어갔다. 장례는 가족장, 빈소는 아주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이며, 조문은 10일 오전 10시부터 가능하다. 영결식은 12일 오전 8시 아주대병원 별관 대강당에서 거행될 예정이다.

장지는 충남 태안군 소재 선영. 유족으로는 미망인 정희자 전 힐튼호텔 회장, 장남 김선협 ㈜아도니스 부회장, 차남 김선용 ㈜벤티지홀딩스 대표, 장녀 김선정 (재)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 사위 김상범 이수그룹 회장 등이 있다.

대우세계경영위원회 관계자는 "김 회장은 지난해 8월 말 베트남 하노이 소재 GYBM(Global Young Business Manager, 청년사업가) 양성 교육 현장을 방문하고 귀국한 이후 건강이 안 좋아져 통원 치료를 하는 등 대외활동을 자제해오다 12월 말부터 증세가 악화돼 장기 입원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이로써 김 회장이 참석한 공식 행사는 지난해 3월22일 열린 '대우 창업 51주년 기념식'으로 기록됐다. 대우그룹 임직원들은 1999년 그룹 해체 이후에도 매년 창업기념일을 기려 기념행사를 진행해왔으며 김 회장을 포함해 300여 명 이상의 임직원이 참석해 왔다.

대우세계경영위원회는 김 회장이 "청년들의 해외 진출을 돕는 GYBM 교육사업의 발전적 계승과 함께 연수생들이 현지 취업을 넘어 창업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체계화해줄 것"을 유지(遺志)로 남겼다.(서울=뉴스1) 류정민 기자

사진제공(대우세계경영연구회)=김우전 전 대우그룹 회장이 1970년대 말께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에서 자전거로 현장을 다니던 모습. 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