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 공연 장면

[무비톡 김상민 기자]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는 일제 강점기인 1943년 겨울부터 한국 전쟁 직후 겨울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그 시대를 살아야 했던 세 남녀의 삶과 운명을 통해 한민족의 가슴 아픈 역사와 대서사를 담담하고 섬세하게 그려냈다.

원작은 1975년부터 1981년까지 6년간 연재된 소설가 김성종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MBC 드라마로 평균 시청률 44%, 최고 시청률 58.4%에 이어 70%를 상회하는 점유율을 기록하며 많은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2019년 초연된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는 투자 사기로 인해 2년간 준비한 것들을 열악한 제작 환경 속에 미니멀로 보여준 아픔이 있는 뮤지컬이었다. 드라마와 뮤지컬의 가장 큰 차이는 음악에 있었다. 

사진=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 공연 장면

윤여옥의 ‘여명 속에 버려진‘, 최대치의 ‘멈추지 않는다‘, 장하림의 ‘행복하길‘ 등 각 캐릭터를 대표하는 넘버는 고음 만큼 짜릿한 전율을 선사한다. 이런 단독 넘버 외에도 41명의 앙상블이 만들어내는 소리나 송스루 형식으로 진행되는 인물들의 대화도 <여명의 눈동자>의 스케일을 효율적으로 표현한다. 캐릭터들의 새로운 활약도 눈길을 끈다.

권동진 역은 정호근이 연기한 원작과 다르게 해방 이후에도 살아 남아 제주 4.3 사건이라는 또 하나의 역사적 아픔을 겪는다. 학도병일 때도, 제주에서 경찰일 때도 누구보다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려 하는 권동진의 소신과 눈빛이 관객들에게 윤여옥, 최대치, 장하림과는 다른 느낌으로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준다.

일제의 지배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던 1944년. 조신인 학도병 대치와 일본군 위안부 여옥은 민족의 아픔을 공유하며 사랑을 키워 나가지만 행복도 잠시, 전쟁은 두 사람을 갈라 놓는다. 사이판으로 끌려온 여옥을 만난 하림은 임신 중인 그녀를 보살피며 연민의 정을 느끼고 두 사람은 잠시나마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사진=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 공연 장면

해방 후 다시 만난 세 사람, 그들의 엇갈린 운명과 또다시 찾아온 전쟁으로 비극은 다시 또 시작된다. 지리산 자락, 한겨울 살을 에는 바람 속으로 한 여인이 길을 헤매고 있다. 이어지는 총성에 여인은 쓰러지고 무대는 서늘한 푸른빛에서 점점 붉은 핏빛으로 물들어 간다. 쓰러진 여인을 안고 한 남자가 울부짖는다.

그저 함께 있고 싶은 바람조차 사치였던 시대를 살다간 세 남녀의 이야기는 그렇게 서막을 알렸다. 간첩 윤여옥에 대한 신문기사가 무대를 가득 채우고 ‘반역자를 처단하라’며 몰아치는 사람들의 손가락질 속에 윤여옥이 서있다. 이야기는 1950년 윤여옥의 간첩행위 재판으로 시작된다.

재판정에는 그녀의 간첩 혐의가 나열되기 시작한다. 인민군 장교인 남편 최대치를 처음 만났던 일본군 위안부 시절이 그녀의 첫 혐의다. 그리고 이야기는 1940년 일본군 위안소를 시작으로 그녀의 일생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름은 윤여옥, 고향은 남원, 춘향이가 살았던.” 윤여옥을 상징하는 이 대사는 이 작품이 단순히 드라마를 리메이크 한 작품이 아니라 역사의 풍랑을 이겨내고자 했던 수많은 윤여옥을 기억하게 만든다. 

사진=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 공연 장면

여옥은 강제로 끌려간 일본군 위안소에서 학도병으로 징집된 최대치를 만나게 된다. 이 청년은 여옥에게 이름을 물어주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온기 가득한 말을 건넨다. 최대치는 자신의 아이를 갖게 된 여옥과 부대를 탈출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이별을 맞게 된다.

사이판으로 가게 된 여옥은 군의관 하림을 만나게 된다. 뱃속 아이를 꼭 살려내겠다는 여옥의 강한 의지는 하림의 마음을 흔들게 된다. 여옥은 옆에서 자신을 지켜주는 하림과 새 삶을 시작하려 한다. 하지만 1945년 조선이 해방되고, 미군에서 일하던 하림과 여옥 앞에 최대치가 나타난다.

이미 공산당원이 된 최대치를 따라 여옥은 제주도에 도착한다. 미국과 소련에 양분된 한반도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서로 함께 있기 위해 찾아 온 제주도는 4.3항쟁이 일어나고 여옥은 아들을 잃는다. 이야기는 여옥의 간첩 혐의를 따라 여옥의 일생을, 아니 우리 역사의 비극을 쫓아간다. 

사진=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 공연 장면

방대한 역사를 방향을 잃지 않고 끌고 가는 서사의 힘은 이 작품의 힘이기도 하다. 여옥의 아버지이자 독립운동가인 윤홍철의 넘버 중 ‘서로 다른 곳을 볼 수도 있지. 하지만 우리는 하나의 바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은 좌우의 대립으로 혼란스러웠던 시대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전해 준다.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는 윤여옥을 작품의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펼쳐간다. 여옥과 대치, 하림 세 남녀의 삶은 당시를 살아 낸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옥은 열심히 살아냈고 운명 앞에 당당했다.

‘반역자를 처단하라’는 사람들의 손가락질 앞에서도 담담히 서 있을 수 있었던 것도, 검사가 ‘마츠코’라고 호명하자 “개명한 적 없습니다”라고 당당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 시절을 살아 낸 우리들의 모습이 바로 여옥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 공연 장면

비록 공연장 밖은 여전히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빨갱이를 처단하자’라는 날선 구호가 메아리쳤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펼쳐든 태극기가 공연장 밖에서 빨갱이로부터 나라를 구하자는 집회 한가운데 펄럭이고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명’은 밝아올 것이고 세상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것이니까.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를 시작으로 갈라지는 우리나라의 모습과 윤여옥을 두고 공산당 간부가 된 최대치와 미군 장교가 된 장하림의 대립 등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특히 작품은 '제주 4.3 사건'을 표현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이념 갈등의 문제로 형제, 자매의 목숨을 빼앗아야 했던 비극의 역사는 무대 위에 오롯하게 구현됐다.

역사를 관통하는 삶을 꿋꿋이 살아 낸 윤여옥 역에 배우 김지현, 최우리, 박정아가 열연한다. 여옥을 살아가게 했고 함께하고 싶었던 남자 최대치 역에 배우 테이, 온주완, 오창석이 캐스팅됐다. 여옥의 삶을 지켜주고 바라본 남자 하림 역에 배우 마이클 리와 이경수가 함께 한다.

사진=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 공연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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