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아이엠컬처)=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 오픈 리허설. 

집에서 혼자 생일을 보내는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 엘레나(양소민). 극은 학생 4명이 엘레나 선생님 집을 방문해 생일 축하 인사를 건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적막 했던 집은 금세 왁자지껄해진다. 발로쟈(박정복), 빠샤(오정택), 비쨔(김효성), 랼랴(이아진)가 존경을 표하며 건네는 꽃다발과 축배 속에서 엘레나는 벅찬 표정을 짓는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도 잠시, 학생들은 머잖아 본색을 드러낸다. 좋은 대학에 가려면 시험 성적을 고쳐야 한다며 엘레나에게 수학 과목 답안지를 보관한 금고 열쇠를 내놓으라고 다그친다. 이후 극은 학생들을 타이르고 훈계하는 엘레나와 엘레나를 협박·회유하는 학생들이 팽팽히 맞서는 구도로 전개된다. 

엘레나와 학생들은 윤리적인 면에서 대척점에 있다. 엘레나가 "정의와 양심이 삶의 최우선 가치가 되어야 한다"고 하자 학생들은 "우리 시대엔 잘 살려면 비열해져야 한다"며 코웃음친다. 이 감동 넘치는 상황은 오래 가지 않는다. 

사진제공(아이엠컬처)=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 오픈 리허설.

학생들은 각자 자신들의 집안 형편을 토로하고 고민을 꺼내 놓기 시작하면서 돌변하기 시작한다. 학생들의 목적은 선생님 생일축하가 아니다. 학생들은 엘레나 선생님이 가지고 있는 시험지 보관실 열쇠가 필요한 것이다. 어제 본 시험 점수를 고치기 위해서다. 빠샤는 지금보다 더 나은 점수를 원한다.

더 나은 미래가 보장된 직업을 위해 좋은 대학을 가야하기에 졸업 전 마지막 시험 점수를 더 높게 고치고 싶다. 비쨔는 가난하고 평범한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다. 적어도 시험점수 B는 받고 싶은데 수학시험 문제를 하나도 풀지 못했다.

비좁은 집에서 가족들과 부대끼며 사는 랼랴 역시 고급 주택과 고급 승용차를 타며 고급스런 삶을 살기 원한다. 이 학생들은 모두 엘레나에게 열쇠를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를 한다. 자신들은 모두 그렇게 살 권리가 있으며 그런 삶을 위해 지금 기회를 잡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사진제공(아이엠컬처)=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 오픈 리허설.

엘레나는 이 갑작스런 상황에 충격과 혼란에 휩싸인다. 엘레나가 열쇠를 내놓을 수 없다고 잘라 말하자 학생들은 온 집을 뒤지기 시작한다. 학생들은 밤새 자신들의 논리를 내세우고 엘레나는 그런 학생들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려 한다. 이 팽팽한 줄다리기는 밤을 새우고 계속된다.

엘레나는 지쳐가고 학생들의 욕망은 시간과 비례하게 증폭된다. 우등생 발로쟈는 시험성적 고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발로쟈는 열쇠를 갖고 싶은 아이들과 도덕과 원칙으로 중무장한 엘레나 사이에서 자신이 짜놓은 게임판대로 조종하며 게임을 즐기고 있다.

발로쟈는 엘레나가 뜻대로 해주지 않자 해서는 안 될 마지막 수를 던진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게 될까. 엘레나는 결국 열쇠를 내놓게 될까. 사실 열쇠를 갖게 될 것이냐, 혹은 내놓게 될 것이냐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기에 버거운 감정이 더 앞선다.

전 시즌 공연도 그러했지만, 여전히 이 연극은 보는 내내 고통스럽다. 어른들의 욕망과 너무나 닮아 있는 학생들의 욕망을 듣는 고통이 그렇다. 그것이 논리의 오류이지만 반박하기 힘들고 아니지만, 아니라고 말하기에 내 자신이 떳떳하지 못하다. 

사진제공(아이엠컬처)=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 오픈 리허설.

원작 배경이 구 소련의 몰락시기이고, 혼란스런 이데올로기를 다루고 있으며 1981년 초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이 울림을 마냥 좋아하기에도 마뜩찮다. 또 다른 고통은, 결국 아무도 가져가지 않은 열쇠를 쥐고 울부짖는 랼랴의 눈물을 보는 것이다.

엘레나는 열쇠를 내놓지만 아무도 그 열쇠를 가져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엘레나의 정의가 이긴 것일까. 학생들은 지극이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라 비아냥거렸던 도덕성을 되찾은 것일까. 세상은 그래도 선이 힘을 갖고 있는 것일까. 그 어떤 질문에도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하는 현실을 마주하는 것은 늘 고통이다. 

다시 돌아온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은 지난 시즌보다 더 촘촘해진 대사가 압권이다. 순간 순간 장면이 멈춘듯한 연출은 극을 전환시키고, 긴장을 고조시킨다. 랼랴의 옷이 강제로 벗겨지는 순간 장면이 멈추고 랼랴 옷 단추가 떨어져 튕겨 나가는 소리 효과는 그것만으로도 손을 모아쥐게 만든다. 지난 시즌 가로로 길었던 무대가 다소 컴팩트해졌다. 하지만 극에 집중하기에는 더 좋아졌다. 

사진제공(아이엠컬처)=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 오픈 리허설.

무엇보다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은 100분 토론보다 더 팽팽하고 더 드라마틱한 설전이 오고가는 매력넘치는 작품이다. 차마 수준떨어져 보일까 싶어 내놓지 못하는 속마음을 들킨 기분도 들게 한다. 그것을 십대 청소년들의 입을 통해 들어야 한다는 것이 슬프지만 말이다.

원작 희곡은 구 소련의 극작가 류드밀라 라주몹스까야가 1981년 청소년에 대한 극을 써달라는 정부 요청에 따라 쓴 작품이다. 그러나 구시대의 몰락과 혼란스러운 이데올로기를 그렸다는 이유로 정부로부터 오히려 공연이 금지됐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개방정책을 펼친 1987년이 돼서야 공연을 재개할 수 있었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의 문제의식은 유효하다.

사진제공(아이엠컬처)=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 오픈 리허설.

신념과 양심을 지키며 살아온 엘레나, 성공과 부를 위해서라면 양심을 버릴 수도 있다고 믿는 네 학생의 대립은 최근 한국 사회의 화두인 계급과 불평등, 세대 갈등을 연상케 한다. 금고 열쇠를 두고 펼쳐지는 이들의 이야기는 선과 악, 도덕과 부도덕 같은 상반된 가치에 대한 첨예한 질문으로 관객을 고민에 빠지게 만든다.

작품이 불편한 또 다른 이유는 상반된 대립 속에서 그 어느 편도 들지 않는 냉정함 때문이다. 욕망에 충실한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거부할 수 없다는 비관적이면서도 현실적인 판단이 녹아 있다. 객석을 무대 정면이 아닌 측면에 배치한 것도 인상적이다. 관객으로 하여금 인물들을 옆에서 지켜보도록 해 극에 대한 몰입 대신 관찰과 판단을 하게 만든다.

 2007년 국내서 초연한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은 2017년부터 공연제작사 아이엠컬쳐가 제작해 무대에 오르고 있다. 올해는 대학로 대표 연출가 김태형이 연출을 맡았다. 우미화, 정재은, 양소민(이상 엘레나 역), 김도빈, 박정복, 강승호(이상 발로쟈 역), 김슬기, 오정택(이상 빠샤 역), 최호승, 김효성(이상 비쨔 역), 김주연, 이아진(이상 랄랴 역) 등이 출연하며 공연은 9월 6일까지 진행된다.

사진제공(아이엠컬처)=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 오픈 리허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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