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영화평론가 심영섭

'태우다'라는 행동을 욕망이란 관점에서 생각해 보았을 때, 기존 욕망과 차이나는 지점은 '있는' 존재를 '없게' 한다는데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욕망은 결핍을 채우고 없음을 있음으로 만든다. 배가 고프면 밥을 찾고, 돈이 없으면 돈을 번다.

그러나 이러한 리비도의 에너지와 달리 ‘태우고 싶은 욕망’은 타나토스 즉 죽음이나 소멸로 가는 욕망의 일종으로서, 탄다는 것에 대한 시각적 이미지의 장대함은 살인과는 또 다른 쾌감을 남길 것이다. 영화 <버닝>은 이렇게 타는 것을 매개로 한 '없음'의 영화이다.

어머니가 가출하고 아버지가 분노 조절 장애로 감옥에 가 있는 종수에게 가족들은 모두 사라진 존재이다. 우연히 만난 동네 친구 해미는 귤까는 시늉을 하며,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귤이 ’없다는 것을 잊는데 있다’고 한다. 대상부재는 영화 <버닝>을 관통하는 흙수저인 20대들의 결핍의 총합과 같다.

해미가 아프리카 여행을 떠난 후 해미의 집에 들어 가 혼자 자위 행동을 하는 종수의 행동 역시 육체적 대상이 증발되거나 찾을 수 없을 때, 혼자 대상을 상상하며 결핍을 메우는 행동이다. 무엇인가가 없을 때, 우리는 상상력이나 자기 자극을 통해서만이 그 없음을 순간적으로나마 잊으려 한다.

그러나 벤이 나타나면서 사정이 달라진다. 해미가 아프리카 여행 중에서 만난 벤은 포르쉐를 몰고 강남에서 별 다른 일 없이 하루하루를 보낸다. 종수의 말을 빌면 일종의 위대한 게츠비같은 존재들인데, 한국에는 이러한 게츠비가 너무 많다고 중얼 거린다. 결핍이 없는 벤은 상상력으로 없음을 메꾸지 않아도 된다. 

대마초를 은밀하게 나누어 피우며 비닐 하우스를 태우는 취미를 갖고 있다고 종수에게 고백한다. 오히려 그는 너무 많이 있어서 소멸의 욕망을 지니고 있다. 그후 해미는 사라져 그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어진다. 이후 영화는 모든 것이 모호한 상태에서 종수가 해미의 실종을 추적해 가는 과정을 세밀히 쫒아 다닌다.

그것은 안개처럼 모호하고 연기처럼 부질없이 종수의 심연을 어지럽힌다. 사실 해미가 실종되었는지 벤에게 살해되었는지 그 답은 영화 내내 몇 개의 증거들만 있을 뿐, 확실한 증거는 찾을 길이 없다. 또한 해미가 키우고 있다고 하지만 종수는 배설물로 그 흔적만 찾았을 뿐인 고양이 역시 해미의 고양이 보일(보일러에서 찾아서 보일, 의미 심장하게도 끓는) 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다.

이창동 감독은 기존 내러티브에 대한 강박을 버리고 다양한 메타포와 번뜩이는 미장센과 상징들로 치장한 달라진 버전의 아트하우스 영화의 전형을 들고 나왔다. 영화는 캐릭터에서 전이되어 느껴지는 감정이나 감독의 인장 같은 특정 스타일, 구어체 대사의 생생함 같은 것들은 다 생략되어 있다.

예를 들면 영화 중반부 이후 종수가 그토록 해미를 찾아 다니는 것도 해미를 사랑해서이다. 해미와 만나 사랑을 나눌 때, 그는 남산의 창에 비쳐 잠깐 들어 온 그 햇빛이 벽에 어른 거리는 것을 본다. 그 햇볕은 영화 <밀양>에서 신애가 집앞 마당에서 머리를 스스로 자를 때 잠깐 들어 온 그 햇빛과 동일한 것이다.

그 햇빛은 목격하는 종수를 보면 머리로는 종수가 해미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버닝>에는 <밀양>에서 관객이 느꼈을 법한 그 감정의 깊이가 관객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종수가 해미에게 느낀 사랑에 빠진 순간은 이 장면이 전부이다.

마치 이론 물리학 공식처럼 영화적인 시각적 이미지와 대사들과 미장센의 합을 맞추어 보면 모든 것이 이해되고 설명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후반부 종수가 해미를 찾는 간절함도 마음으로 이해하기는 힘들다. 또 한 가지 도저히 간과 할 수 없는 것은 이창동처럼 도저한 시선으로 인간의 고통과 구원에 대한 통찰을 포기하지 않는 감독조차 완전히 욕망의 대상으로 여성을 취급한다는 비극에 대한 실감이 그것이다.

여기서 해미는 불타오르는 노을을 배경으로 상의를 벗고 아프리카에서 보았다는 그 춤, ‘리틀 헝거’에서 시작한 그러나 마침 ‘그레이트 헝거’ 즉 인생의 의미를 찾는 구도자로서 춤을 춘다. 여성 관객의 눈으로 보면 해미는 카드빚에 허덕이는 허황한 20대가 아니라, 자기 앞의 생을 사는 멋지고 주체적인 여성 버전 조르바 같다. 이 장면의 카메라 워크와 미장센은 모든 것이 공들여 찍고 있고 눈물나게 아름답다.

영화 <버닝>의 가장 빼어난 장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후 해미를 취급하는 감독의 시선에는 너무나 큰 이질감이 뒤따른다. 해미는 다른 여성들과 겹쳐진다. 벤은 이 여자들의 여행기가 비슷하다고 느끼고 외국 이야기를 하는 때마다 하품을 한다. 벤의 화장실 서랍에 숨겨져 뒤섞인 여자들의 악세사리처럼 해미의 독특성은 갑자기 사라진다.

또한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여성들 해미의 어머니, 종수의 어머니, 해미의 동료 모두는 지나치게 속물적이고 돈이라는 관점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창동 감독의 세계관 중 일부분이기도 하지만, 이번 깐느 영화제에서 케이트 블란쳇 같은 여성주의적 시선이 뚜렷한 심사위원장을 만난 것이 이창동 감독의 불운 이였을까.) 해미는 없어졌지만, 역설적으로 계속 스크린에 그 존재감이 ‘있어야’ 했다.

해미가 빠진 후 영화는 급격히 관념적인 예술 영화 쪽으로 추가 기운다. 20대의 심리적 억압과 솟아오르는 광기에 관한 영화인데 심연에 가득 찬 분노에 관한 영화인데, 영화는 지나치게 상징과 은유적 미장센으로 가득 차 있다. 문학에서 시작한 한 감독이 점차 영화 만들기에 매료되는 여정에 <버닝>은 있지만. 영화는 그 이상으로 뻗어가지 못한다.

남루하고 넘치는 폭력안에서 영화 <시>가 보여준 서정성, <밀양>의 고통과 구원. 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초록 물고기>. <박하사탕>이 보여주었던 과거로의 시간 여행과 절묘한 편집 양식. 바늘만한 환타지로 척박하고 누추한 현실에서 깊은 인생의 의미라는 우물을 팠던 ‘그레이트 헝거’가 바로 이창동 그였지 않았나. 영화의 결말은 그저 무겁고 음울할 뿐. 영혼을 그을리고 싶었지만, 영화 <버닝>, 결코 뜨겁지 않았다.

[심영섭님 페이스북 글에서] 

포스터=버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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