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단성사 전경

 

민족의 극장이라고 불릴 만큼 근대사와 격동의 시간을 같이 한 단성사는 1919년 10월 27일 최초의 한국영화 ‘의리적 구토’를 상영하였다.

이날을 기념하여 ‘영화의 날’이 제정되었으며 이에 단성사는 100주년을 기념하고 지나온 영화 역사의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모든 영화인들을 포함하여 많은 분들에게 기억되고자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의 주도하에‘단성사영화역사관’을 만들어 내년 백주년을 맞춰 10월27일 개관을 준비하고 있다.

‘단성사영화역사관’을 만든 자일개발(주)은 영안모자의 계열회사다. 영안은 2003년 대방동 숭의역사관을 시작으로 영안기록실(2006), OBS방송역사체험관(2007), 남산숭의인물관(2008), 남산외교구락부 전시실(2013), 단성골드보석역사관(2016), 지게차(클라크)100주년 기념실(2017) 등 내부 5곳, 외부 4곳의 역사관을 만들었다.

또한 영안모자기록실에는 1959년 영안 창업 당시 사용했던 오래된 물건들과 각종 증서들이 담겨있는 사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사료들은 영안의 도전과 성공의 스토리를 전해주는 동시에 영안이 역사를 얼마만큼 중시하고 기록 자료의 가치를 얼마만큼 소중히 여기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많은 이들이 ‘영화관 단성사’로만 알고 있는 이 터는 원래 좌포도청이 있던 자리였다. 포도청은 1784년 한국 천주교구가 창설된 후 천주교인 색출에 앞장선다. 을묘박해(1795)를 시작으로 기해박해(1839),병오박해(1846),병인박해(1866),기묘박해(1879) 등 수많은 사건을 통해 교인들을 탄압하기에 이른다.

배교를 외치면 살려줬지만 많은 이들이 끝내 거부하고 순교를 택했다. 그들의 순교로 이곳 좌포도청 자리는 천주교인들의 성지가 되었다. 천도교(동학) 2대 교주 최시형도 이곳 좌포도청에서 1893년 6월 2일 처형됐다. 이 후 1907년 6월 경성의 실업가였던 지명근, 주수영, 박태일이 ‘힘을 모아 뜻을 이루자!’라는 이념으로 설립했다.

이후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는 우여곡절 끝에 1918년 광무대 경영자 박승필이 인수하여 상설 영화관으로 개축하였고 1919년 10월 한국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 1924년 조선영화1호 <장화홍련전>, 1962년 나운규의 민족영화 <아리랑>을 개봉하면서 단성사는 한국영화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1932년 박승필이 사망한 후 지배인 박정현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견제와 경영난 속에 소유권이 일본인에게 넘어가며 대륙극장(大陸劇場)으로 이름이 바뀌는 치욕을 겪는다.

사진=신성일 배우와 영사모 멤버

해방 후 이름을 되찾고 전쟁의 포화 속에도 살아남은 단성사는 주로 외화를 상영하며 그 명맥을 유지하다가 1977년 <겨울여자>의 대 흥행을 통해 한국영화의 명문개봉관으로서의 위상을 회복했다. 이후 1990년 <장군의 아들>, 1993년 <서편제>를 연달아 히트시키면서 제2의 전성시대를 맞았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복합상영관시대가 열리면서 단성사를 찾는 관객이 크게 줄었고, 2005년 복합상영관으로 탈바꿈하는 등 재기를 노렸지만 경영악화로 부도가 반복되면서 리모델링 공사조차 끝내지 못한 채 도심 속 흉물로 방치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2015년 3월 영안모자 계열의 자일개발이 건물을 인수하고 단성사영화역사관을 설립함으로써 단성사는 한국영화역사 100년의 발자취를 담은 역사교육현장으로 다시 태어났다. 곧 개관하게 될‘단성사영화역사관’에는 82,400여점의 방대한 영화관련 자료들이 전시된다. 12일에는 배우 신성일씨가 영사모(영화를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과 준비중인 전시관을 관람해 지난 배우 생활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사진=신성일 배우와 영사모 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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