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스틸 컷= 세자매
스틸 컷= 세자매
스틸 컷= 세자매
스틸 컷= 세자매

가정 폭력의 피해자로 유년을 보냈으나 사회에서 평범한(이라 쓰고 사랑 받는, 혹은 미움 받지 않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던 ‘세자매’의 이야기. 엄마가, 또는 자식(들)이, 가부장적 남성의 거친 폭력에 노출되었던 역사는 흔하다.

가장의 폭력은 가장이란 이유로 늘 면피가 되었고 피해자들은 자신을 갉아 먹어온 피해 의식을 꽁꽁 숨겨가며, 또 공포의 기억을 묻은 채 딴은 완벽한, 혹은 더욱 쎈(미친, 폭력적인)인간으로 살아가려 안간힘을 쓴다.

‘세자매’들에게 가정 폭력은 원인이자 결과이며 삶의 곳곳에 도사린 부조리한 상황에 대처하는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익스큐즈로 작용한다. 나아가 왜곡되거나 변형되어 대물림 된다. 영화 내내 ‘세자매’의 '먹는 일'을 대하는 태도에 주목했다.

먹는 즐거움을 일체 배제하는(혹은 본인은 먹는 데서 기쁨을 느낄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듯한) 첫째 딸(김선영)은 유년 시절 아버지의 가정 폭력에 물리적으로 가장 날카롭게 시달린 피해자다.

그녀는 어른이 되어서도 남편과 딸로부터 가해지는 폭력의 피해자로 살아가나 매 번 미안하다고 버릇처럼 말하는 건 그녀 쪽이다. 그녀에게 오로지 돈을 갈취하는 것만이 목적인 법적 남편은 그녀가 생존을 위해 끼니로 먹는 빵조차 뱃살의 원흉이라며 살 좀 빼라고 비하한다.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쏟지 못하고 담고만 살던 그녀는 어느 날 암을 선고 받는다. 첫째는 먹는 일을 비롯한 사는 일 자체가 사사건건 미안하다. 미안해 해야만 사는 일을 허락 받는다 여기는 것만 같다. 하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생존하고 싶어 한다.

기어이 스스로에게 상처를 그어 흐르는 피를 확인하면서 까지. 그녀에게 폭력은 생존에 필요한 먹이가 되고 제 몸에 그은 상처에서 흐르는 피는 배설이 된다. 가정 폭력의 또 다른 희생자인 막내 동생이 아버지의 생일상에 갈긴 오줌 세례에 첫째는 그 음식을 꾸역꾸역 제 입으로 가져가며 식구들에게 또 목사님에게 같이 먹자고 외친다.

가족이야말로 종교 공동체야말로 함께 나누는 존재가 아니냐고, 맛있는 음식만이 아닌 고통까지도 그래야 하는 거 아니냐며 울부짖는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세자매’ 중 그나마 제일 많이 누리며 제대로 자란 듯 보이는 둘째딸(문소리)의 食을 향한 집념은 대단하다.

자신의 사회적 위치, 완벽한 엄마이자 아내,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보여야(살아야) 한다는 신념, 가족애와 자매애, 옛 추억, 그 모두가 상차림으로 구현된다. 그러므로 그녀가 먹이를 주며 키우는 남편(내가 주는 먹이만을 내가 차려준 방식으로만 먹고 살아야 하는 반려 존재)를 앗아간 내연녀를 향한 분노는 타의 추종을 불허 한다.

둘째는 가족과의 전화 통화에서 늘 마지막에 '밥을 잘 먹어야 해'라는 문장을 덧붙인다. 또 강박처럼 되뇌이는 기도는 삶에 떠먹여 주는 밥이다. 그녀에게 '밥'은 그토록 특별한 무엇이기에 지옥과 같았던 유년의 기억과 그녀가 짊어지지 않아도 될 죄책감마저 떠안긴 뻔뻔한 생부의 생일날에도 그녀는 거금을 들여 호사스러운 식사 자리를 마련한다.

그녀가 남편의 외도를 확인한 날은 광교의 51평 신축 아파트에 자신이 성가대 지휘자로 봉사 중인 교회의 목사, 권사, 집사 등을 초대한 집들이 자리였다. 그녀는 교회 사람들을 초대해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음식을 차렸으나 그 자리를 완벽하게 빛내 주어야 할 교수 남편은 그녀가 지휘를 맡고 있는 교회 성가대의 단원이자 남편 학교의 제자인 효정과의 외도로 인해 뒤늦게 귀가한다.

결국 둘째는 교회 기도회에서 내연녀의 아침 식사 기회를 폭력적으로 박탈한다. 물론 자신이 먹이를 주며 길러온 남편을 놓아줄 마음 또한 없다. 오직 기도하며 부르고 또 부른다, 아버지! 라고. 그녀가 신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기독교에 빠진 건 우연이 아니다.

그 아버지만이 나를 기르시고 나를 먹이시는 존재여야 하므로. 밥 대신 술과 과자로 연명하는 셋째(장윤주)는 어떠한가. 너무 어리고 해맑아 유년시절 목격한 가정 폭력의 기억이 소거된(지우고픈 혹은 방어 기제로 인해 망각된) 그녀가 남자(남편)를 고르는 기준은 그저 하나다.

착한(아내와 자식을 때리지 않는) 남자. 맛있는 밥은 먼 추억 속에만 존재하는 신기루 같은 존재일 뿐, 그녀는 밥 외의 것들만 주로 먹고 마신다. 그녀는 입으로 먹고 입으로 싼다. 과자와 술, 술과 과자, 그리고 그 부산물들을. 그녀가 비로소 남편에게 아내로, 남편의 아들에게 엄마로 다가 가고자 결심했을 때 그녀는 처음으로 부엌에서 밥을 차린다.

남편과 의붓아들의 고봉밥 위에 달걀 후라이를 얹어 주며 이제부터는 “같이 먹자”고 외친다. 그녀에게 식사는 가족(함께)의 증명이다. ‘세자매’는 나름의 방식으로 쓰레기마냥 내동댕이쳐진 자신의 자아를 건지려고, 어떻게 해서든 놓치지 않으려고, 스스로에게 상처를 긋거나 교회에 집착하거나 술에 절어 살아왔다.

‘세자매’의 그 후 삶이 어떤 모습으로 이어질지 알 수 없고 앞으로의 삶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지 모른다. 다만 웃으며 ‘세자매’가 함께 셀카를 찍을만한 마음의 공간 정도는 마련했다는 점에서 영화의 엔딩이 참 좋았다. 어른이란 무엇일까?

첫째의 딸 보미가 외할아버지 생일잔치에서, 어른이면서 왜 미안하단 말을 안 해 씨발! 이라 외쳤던 장면이 맴돈다. 그러게... 어른은 어째서 미안한 짓을 하고서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걸 진다고 생각하는 걸까. 사과 받지 못 한 피해자의 삶은 그로 인해 엉망으로 망가져 가는데 말이다.

어느새 나는 ‘세자매’의 삶이 부디 덜 고단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덧붙여 문소리는 대한민국 영화 역사에서 연기의 텍스트로 삼아야 할 배우라 생각한다. 영화 속 ‘세자매’의 서사가 자연스레 이어질 수 있었던 건 문소리 배우가 모든 장면을(심지어 그녀가 등장하지 않는 때조차) 힘차게 관통해 단단히 묶고 있었기 때문이다.

뒤통수와 목덜미마저 극에 완벽하게 몰입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던 굉장한 경험이었다. 안톤 체호프의 희곡 중 <세자매>라는 작품이 있다. 영화와는 전혀 다른 스토리텔링 이지만 그 작품에 등장하는 문장으로 이 영화의 리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네, 잊히겠죠. 그게 바로 우리의 운명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소중하고 의미 있고 아주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도 세월이 지나면 잊히거나 하찮은 일이 돼 버립니다." 역설적으로 '그런 것'들이 하찮은 일로 잊혀져야지만 삶이 지속될 수 있는 건 아닐까. 박제된 ‘세자매’의 셀카에 단지 미소만 남아있듯이.

포스터= 세자매
포스터= 세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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