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격신'은 없지만 '안경 액션'이 흥미진진...

포스터=공작

영화관에 갈 때는 항상 이십분 정도 미리 간다. 영화가 시작되길 기다리면서 극장 내부를 둘러보는 재미가 있다.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말소리, 고소하고 달큰한 팝콘 냄새, 곧 개봉할 예고 영상에서 나오는 소리와 합쳐져 약간 번잡스럽다. 그 번잡한 틈 사이로 현재상영작과 개봉예정작의 포스터가 보인다.

터키색으로 물들인 <맘마미아! 2>와 오늘 볼 <신과 함께 2>의 포스터를 집는다. 관심 없는 영화는 안중에도 없다. 앞으로 볼 것도 아니고, 관심도 없다. 영화<공작>도 관심 없는 영화중에 하나였다. 한국영화에서 흔하디 흔한, 익숙한 얼굴의 남자배우들이 굳은 얼굴로 서있는 심각한 분위기의 포스터는 정말이지 내 관심 밖이다.

고만고만한 내용에, 고만고만한 분위기에, 너무 자주 봐서 길 가다가 하이파이브를 할 거 같은 배우들은 더 이상 흥미롭지 않았다. <공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무비톡 기사와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볼만 하다며 <공작>을 추천했다. 그러던 차에 얼마 전 CGV 홈페이지에서 <공작> 1+1 행사를 하기에 '한번 봐 볼까?'하는 마음에 관람하기로 했다.

<공작>은 암호명 '흑금성 사건'이라는 실화를 토대로 만든 작품이다. 지난 5월 칸 영화제에 소개되기도 했다. 약 3분간의 짧은 기립박수를 받았는데,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외국인들에게는 다소 지루 할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1997년 15대 대선을 전후로 안기부에서 파견된 공작원 '박석영'이 북한의 핵개발 정보를 빼내려 대북 사업가로 위장하고 베이징과 평양을 오가는 내용을 담았다. 첩보영화에서 흔하게 나오는 총격신이라던지, 현란한 액션 장면은 이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다.

해외진출에 다소 걸림돌이 될 만한 요소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공작>은 총을 뺀 대신, 적극적인 소품 활용으로 인물들 간의 긴장감을 한층 더 높였다. 필자가 꼽은 이 영화의 '3대 소품'은 다음과 같다. 안경, 위스키, 시계. (스포일러 주의)

나는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소품으로 안경을 꼽았다. 안경은 등장인물의 심리를 가리는 용으로 사용되었다. <공작>의 등장인물들은 북한 보위부 과장 정무택(주지훈 분)을 제외하고 모두 안경을 쓰고 나온다. 공작원 박석영(황정민 분)은 처음에는 안경을 쓰지 않았다가, 자신의 신분을 감출 때는 여지없이 안경을 쓴다.

북한 대외경제위 처장 리명운(이성민 분)도 항상 안경을 쓴 모습으로 나왔으나, 눈은 안경의 반사된 빛이나 그림자로 인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박석영에게 처음으로 본인의 본심을 드러냈을 때서야 비로소 눈이 보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안기부 해외실장 최학성(조진웅 분)은 박석영 몰래 리 처장과 일을 꾸미려고 할 때 평소 쓰던 안경을 벗고 눈이 반쯤 가려지는 색안경을 쓰고 그를 독대한다.

정 과장만이 처음부터 끝까지 유일하게 안경에서 벗어난 인물이었는데, 그는 정 과장이 다른 인물들과 다르게 처음부터 끝까지 평면적인 인물의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인물들이 전부 서로의 뒤에서 '공작'을 펼칠 때, 말 그대로 위대한 수령 동지에 대한 무식한 충성심으로 일관된 행동을 보인다. 한 마디로 안경을 쓴 인물들은 전부 '공작원'인 셈이다.

'공작'의 등장인물들. 정 과장(주지훈 분)을 제외하고 모두 안경을 썼다.

두 번 째는 위스키다. 이 영화에서는 지나치리만큼 위스키를 나누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유리잔에 부어지는 위스키의 홀로샷(?)도 꽤 자주 나온다. 박석영은 처음 리 처장을 만난 자리에서 그가 술을 권하자 끝까지 술을 거부한다. 후에 김정일을 만났을 때도 똑같은 모습을 보인다.

박석영이 자신의 상사 최 실장을 만날 때도 술을 마시는 건 최 실장뿐이다. 위스키는 곧 권력을 의미한다. 한 장면에서 주도적으로 분위기를 이끌고, 극적인 상황을 만드는 인물들은 모두 위스키 잔을 쥐고 있다. 대표적으로 리 처장이 위스키에 대한 상징적인 서사를 만들어주고 있다.

처음 리 처장이 등장했을 때는 박석영이 확실히 압도되어 있었고, 박석영에게 무력을 행사하려는 정 과장을 문책하는 듯 후에 김정일이 등장할 때만큼이나 강압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박석영과 리 처장의 뜻이 점점 들어맞으면서 그의 강압적인 분위기는 사그라들고 종국에는 박석영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한다. 누구 하나 우위에 있는 자리가 아닌 리 처장의 집 식탁에서, 박석영은 처음으로 그의 술을 받아들인다.

세 번 째는 시계다. 진품을 거의 똑같이 묘사한 짝퉁 롤렉스시계는 노골적인 자본주의의 상징이다. 박석영이 처음 북한 고위 임원 세 명에게 선물했을 때는 그들을 테스트함과 동시에 눈속임의 상징이었으나, 마지막에서는 우정과 민족통일의 염원을 담은 또 다른 상징이 된다.

리 처장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북한 사람이고 그의 몸은 반사적으로 김정일에게 충성을 다하지만, 자본주의 경제학을 공부하고 또 그걸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등 상당히 진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리 처장이 십년 후 박석영을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롤렉스를 찬 손목을 들어 보이며 웃음 짓는다.

그 장면에서 롤렉스는 박석영과의 짧고도 깊은 우정을 간직했음을 보여주는, 진정으로 인민을 위하는 리 처장의 마음을 상징한다. 그런 리 처장과 사상은 다르지만 신념은 일맥상통하는 박석영 역시 그가 리 처장에게 선물 받은 '호연지기'가 새겨진 넥타이핀을 들어 보이며 미소에 화답한다.

서로를 향해 힘차게 걸어가는 리 처장과 박석영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공작>은 막을 내린다. 영화 문외한인 나조차도 <공작>은 상당히 공을 들였구나.. 라는게 느껴질 정도로 소품에 의미를 부여했다. 총과 액션장면이 없어도 충분히 흥미 있는 전개였기에 재미있게 본 첩보영화였다. 그 외에도 흥미로운 점을 꼽으라면 김정일의 등장이었다.

내가 이전에 본 영화들의 최고 권력자는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다. "각하께서 오십니다." 등의 대사를 통해 긴장감이 조성되면, 등장한 권력자는 높은 의자에 앉아 등을 돌리고 있거나 혹은 신체의 일부만 나오거나, 목소리만 들리는 정도였다. <공작>도 김정일이 등장하기 전 상황은 다른 영화와 다를 바 없었으나, 김정일을 전면에 등장시킴으로서 신선한 효과를 연출했다.

키 큰 경호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 나오는 땅딸보 김정일의 등장은 그 시작이 정말 우스웠다. 실제 김정일과 싱크로율 100%를 자랑하는 영화 속 김정일(기주봉 분)의 분장은 놀라우면서도 너무 닮았기 때문에 우습기 짝이 없었다. 이전의 클리셰를 깨 부시려는 이 연출은 김정일이 한없이 하찮게 보이는데 크게 공헌을 했다고 본다. 후에 김정일이 박석영과 리 처장의 말에 설득당하는 장면에서 그 효과가 두 배나 되었다.

<공작>은 나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부순 영화였다. 하지만 한국영화에서 흔한 여성의 부재와 여성의 외모를 품평하는 장면(북한 여군과 리 처장의 아내에게 "이야, 미인이시네"라고 하는 장면)은 여전히 불편했다. 그러나 총이나 과도한 액션신 없이도 재밌는 첩보물이 나올 것이라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앞으로 다른 영화를 볼 때도 소품을 유심히 보게 될 것 같다. 소품으로 감독의 의도를 찾는 데에 재미가 들려버렸으니까

스틸=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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