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평론가 백정우의 미각 에세이

어린 시절의 나는 걸핏하면 배가 아프거나 탈이 났고, 묘한 냄새나 이질적인 식감과 만나면 비위가 상해 자주 구토를 일으켰다. 그러므로 내겐 먹을 수 있는 것들이 한정되어 있었다. 왜 밥상엔 꼭 김치가 올라와야 하는지,

왜 콩을 넣은 밥을 짓는 건지, 어째서 버섯이나 가지와 같은 끔찍한(?) 채소를 먹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입이 짧은 탓에 빈혈과 영양실조를 종종 일으키던 나는  한우 꽃등심 구이와 곰탕을 파는 식당집 맏딸이었다.

그러고보니 지금까지도 삼겹살보단 소고기 구이를 더 좋아하고 곰탕에 관한 나의 기준은 꽤 까다롭다. 돌아가신 아빠는 멋을 좀 아는 분이셨다. 아빤 내 손을 잡고 종종 경양식집에 갔는데 두 살 어린 남동생 몰래 입이 짧은 나만 데려가곤 했다.

노오란 반숙 노른자를 동그랗게 얹은 도톰한 함박스테이크나 돈까스보다 이게 더 맛있다며 비후까스를 주문해 주셨는데, 고소한 냄새가 식욕을 자극하는 크리미한 수프, 하얀 접시에 납작하게 깔린 라이스와 빨간 체크무늬 냅킨을 깐 아담한 바구니에 담겨 나오는 보들 보들한 모닝롤까지, 내게 경양식집은 아빠를 추억하는 첫 번 째 장소이다.

아빠와의 추억은 영화관까지 이어진다. 유년에 본 영화는 상당수 아빠와 본 것들이었다. 그런 내가 영화와 사랑에 빠진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고 이 경험은 훗날 PC통신 나우누리 영화 퀴즈방에서 찬란한 빛을 발해 영퀴방에서의 내 존재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상실의 시대(무라카미 하루키)'와 '오겡끼데스까?(러브레터, 이와이 슌지)'로 각인된 일본이란 나라에 가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처음의 계획과는 달리 무려 햇수로 6년을 머물렀고 당시 한국보단 음식문화가 다채로왔던 일본에서 내 미각은 번쩍 개안을 하여 食을 貪하는 인간으로 변모했다.

동시에 '씨네마 키드'들이 열광해 마지않던 일본 영화까지 상당수 섭렵할 수 있었다. 렌탈샵 츠타야에서 로망포르노 장르까지 싹 다 빌려봤으니 말 다 했지. 마치 그간의 허기와 갈증을 한꺼번에 해소라도 하려는 듯 말이다.

그래서 마흔일곱의 나에게 지금 무엇이 남았냐 묻는다면 세월과 함께 더 집요하고 정교해진 식탐과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되는 (먹고사니즘과 거의 무관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장황한 영화썰밖엔 없다.

만서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에 다름 아니다. 영화와 미식이 아니었다면 지난 삶은 얼마나 지루하고 남루했을까 싶거든. 오래된 미래를 다가올 미래에 바꿀 수는 없기에 가슴을 쓸어내리곤 한다. 내가 매 번 먹는 일에 진심인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유일했던 맛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기쁨을 아는 몸이거든. 영화 '화양연화' 속 첸 부인(장만옥)의 우아한 치파오도 멋지지만 양철통 안에 담긴 완탕면의 맛이 못 견디게 궁금해 홍콩으로 날아가게 하는 힘,

바로 그런 것들. 영화평론가 백정우의 미각에세이 <맛있는 영화관>을 읽으며 내내 웃고 울었던 건, '맛 경험'이란 영사기를 통해 영화를 보는 분이 나만이 아노란 사실이 반가워서. 미각에세이 <맛있는 영화관>에는 총 77편의 영화가 등장한다.

77편의 영화 속에 등장한 미식은 호화로운 것도 있고 소박한 것도 있으며 관능을 대신하거나 서러움으로 치환되기도 한다. 맛을 찾아 다가가는 액션은 모험이다. 영화관을 나서며 영화 속에 등장한 짜장면이나 삼겹살에 곁들인 소주를 향해 낯선 식당 문을 열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심정을 알고도 남을 것이다.

그렇게 미뢰(taste bud)로 새겨진 오래된 미래는 새로운 미래에도 설레임으로 play된다. 여전히 살아있는 나의 혀는 지금도 미식을 찾는 모험을 향해 스탠바이 중이다.  

[목 차]

세상에서 가장 비싼 잔치국수 <강철비>

겨울에 송어 축제가 열리는 까닭 <송어>

기분을 갈아입는 그녀의 완탕면 <화양연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허삼관>

그곳에 있지 않았던 곱창전골 <버닝>

가족의 탄생을 축하하며 다 함께 외치는 ‘샤브샤브’ <행복 목욕탕>

파스타로 쓴 복수혈전 <바람둥이 길들이기>

걷고 달리고 춤추는 파리의 아프리카인 <생선 쿠스쿠스>

은밀하고 위대한 삼겹살구이 <고령화 가족>

소고기를 쌈 싸 먹는, 누구냐 넌! <특별시민>

손으로 밥을 먹는다는 것 <반두비>

소울 푸드-우동과 우동 <우동>

소울 푸드-라면과 컵라면 <첫잔처럼>, <시라노; 연애조작단>

김밥, 열심히 말다 보면 좋은 일이 생길 거야 <봉자>, <우리들>

내 영혼의 팥죽 한 그릇 <광해, 왕이 된 남자>

육개장, 머리를 조아리게 만드는 맛 <식객>

뚝배기에 담은 세월, 세상의 모든 국밥 <변호인>, <우아한 세계>, <열혈남아>

만한전석 부럽지 않은 샌드위치 <라스트 레시피>

무정한 사람들의 프라이드치킨 <위대한 개츠비>

이 구역 대장은 짜장면이야! <신장개업>, <북경반점>

취향과 문화의 살벌한 로맨스 <나를 찾아줘>

그대, 어디서 무엇을 먹든 복수를 멈추지 말지니 <영웅본색>, <내부자들>

그 남자의 스테이크 <성난 황소>

육식을 거부할 권리에 대하여 <채식주의자>, <잡식가족의 딜레마>

실험실에서 주방까지, 스포이트에서 포크까지 <엘 불리: 요리는 진행 중>

김치와 김장 이야기 <망종>, <식객: 김치 전쟁>

나오며 오래된 미래, 그리고 <한여름의 판타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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