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이혁래 감독, 김정영 감독, 주인공 이숙희, 신순애, 임미경
사진= 이혁래 감독, 김정영 감독, 주인공 이숙희, 신순애, 임미경
사진= 김정영 감독, 주인공 신순애, 임미경, 이숙희, 이혁래 감독
사진= 김정영 감독, 주인공 신순애, 임미경, 이숙희, 이혁래 감독
사진= 김정영 감독, 박찬욱 감독, 이혁래 감독
사진= 김정영 감독, 박찬욱 감독, 이혁래 감독
사진= 김도영 감독
사진= 김도영 감독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 경쟁 부문 및 제1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공식 초청되며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았던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이 지난 6일 언론/배급 시사회 및 기자 간담회와 더불어 VIP 시사회를 성황리에 마무리했다.

<미싱타는 여자들>은 여자라서 혹은 가난하다는 이유로 공부 대신 미싱을 탈 수밖에 없었던 1970년대 평화시장 여성 노동자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통해 세상의 편견 속에 감춰진 그 시절 소녀들의 청춘과 성장을 다시 그리는 휴먼 다큐멘터리.

기자 간담회는 공동 연출을 맡은 이혁래, 김정영 감독과 세 주인공 ‘이숙희’, ‘신순애’, ‘임미경’이 참석, 영화의 작업 과정부터 출연진들의 소감까지 다채롭고 심층적인 이야기들을 가감 없이 담아냈다.

사진= 이혁래 감독, 출연진 임경숙, 임미경, 이순자, 이숙희, 신순애, 김정영 감독
사진= 이혁래 감독, 출연진 임경숙, 임미경, 이순자, 이숙희, 신순애, 김정영 감독

 

[기자 간담회 녹취록]

사회자: 먼저, 이혁래 감독님부터 차례로 인사 한마디 부탁드리겠습니다.

이혁래 감독: 안녕하세요. <미싱타는 여자들> 공동 연출을 맡은 이혁래라고 합니다. 코로나 때문에 굉장히 뒤숭숭한 와중에도 영화를 보러와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김정영 감독: 안녕하세요. <미싱타는 여자들> 공동 연출한 김정영이라고 합니다. 오늘 아침에 꿈인가 했어요. 이 기나긴 장정에, 영화를 드디어 개봉하기 전에 언론/배급 시사회를 하는구나 꿈같았습니다. 선생님들이랑 같이 극장에서 볼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합니다.

이숙희: 안녕하세요. 이숙희입니다. 많이 바쁘실 텐데 영화를 보러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신순애: 지루하셨을 수도 있었을 텐데, 영화 끝까지 보시고 저희랑 함께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임미경: 안녕하세요. 임미경입니다. 저는 항상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슬펐어요. (기자 분들이) 어떻게 보셨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봐서 같이 호응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사회자: 먼저, 무비스트 박은영 기자님께서 질문해주셨습니다. 감독님께는 영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출연자 세 분께는 영화를 본 소감을 부탁드립니다.

김정영 감독: 봉제역사관에 서울 시내 봉제노동자 32인의 구술 생애사 영상을 찍고 있었어요. 한 겨울에 여러 공장을 돌아다니면서 찍었는데, 그 과정에서 미싱 일을 하시는 여성 노동자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어요. 그 중에서 ‘박태숙’ 선생님을 알게 되었고, 그 분이 청계피복노조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이후에 이숙희 선생님을 소개를 통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 분들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단순히 아카이브용으로 영상을 만들기보다, 여성 노동자들을 위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 2018년 1월부터 촬영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숙희: 제가 처음에 영화에 참여한다고 생각했을 때는 그냥 몇 번 인터뷰하면 끝나는 거라고 생각해서 가볍게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이혁래 감독님이 합류하시면서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을 같이 하게 돼서 힘들었습니다. ‘이렇게 다큐가 힘든 건가’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두 번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런데 작품이 나온 것 보니 저희가 생각한 것보다 더 잘 만들어 주셔서 기뻤습니다. 여기에 함께 참석하지 못한 청계피복노동조합 친구들이 어디에서든 이 영화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신순애: 김정영 감독님께서 영화를 만들겠다고 하셔서, ‘제가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다. 대신에 나는 그래도 [열세 살 여공의 삶]이라는 책을 썼으니까 뒷전에서 감독님을 도와주겠다.’라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친구들이 앞에 나와 서주기를 바랬는데요. 제 생각과 다르게 주인공이 돼서 한 편으로는 두렵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숙희가 얘기한 것처럼 그때 함께했던 친구들한테 미안함도 있고 그렇습니다.

임미경: 저는 사실 이 영화를 찍겠다고 감독님이 오셨을 때 마음이 내키지 않았고 옛날 일을 다시 끄집어내야 한다는 게 너무 싫었어요. 영화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정말 싫었어요. 이걸 찍는다는 그 자체가 너무 싫었어요. 그런데 우리 딸이 ‘엄마 그래도 한 번, 남의 일은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으니까 해봐’라고 해서 용기를 내게 되었어요. 저를 아는 모는 사람들이 이 다큐를 보면 저에 대한 삶을 다 알게 되잖아요. 사실은 ‘남들이 알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 항상 다짐했던 얘긴데요. 어차피 이렇게 세상에 나왔으니까 많은 분들이 보고 또 옛날에 평화시장에서 열심히 일했던 그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이제 할머니가 되거나 중년 이상이 되었을텐데, 많이 영화를 보고 또 찾아와주고 같이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회자: 앞서 말씀 해주셨듯이, 영화가 굉장히 공들인 작품이고 인터뷰도 다수 진행된 걸로 아는데요. 이혁래 감독님께 질문하고 싶습니다. 총 촬영 기간과 가장 공들인 부분이 어떤 부분인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혁래 감독: 첫 인터뷰 촬영은 2018년 1월부터 시작이 되었고, 김정영 감독이 먼저 진행하고 있었고 저는 2019년에 합류하게 돼서 함께 연출을 맡았습니다. 마지막 촬영은 2020년 5월 21일에 여러분이 보신 마지막 엔딩 장면을 촬영을 했었고요. 촬영을 할 때 신경 썼던 부분은 영화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우리 영화에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77년에 9월 9일에 있었던 노동교실을 지키기 위한 투쟁인데, 사실 이 사건은 많이 알려진 것도 아니고 사회적인 파장이 컸던 사건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때 청계피복노동조합에 있었던 분들에게는 깊게 마음에 남아있는 사건이더라구요. 이 사건을 다큐로 그린다면, 사건의 객관적인 실체에 접근하기보다 그때 그분들이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그 마음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내용이 인터뷰에서도 표현이 되지만 반응을 통해서 마음을 담아낼 수 있다고 생각을 했었고, 대화 장면이나 옛 사진을 직접 보면서 사진에 대해 직접 반응을 하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이 일하던 일터에 가서 40년 전의 자신과 마주하게 되는 장면들까지 해서, 동료들과의 대화에서 만들어지는 표정 같은 것들에 초점을 두고 촬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자: 중요하고 뜻깊은 부분이 인터뷰뿐만 아니라 사진 편지, 문집 등 다양한 자료 등이 등장해서 관객들의 몰입을 돕고 다채로운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료 수집과 관련해서 전반적인 이야기를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혁래 감독: 저희가 자료를 수집하고 사용할 때 처음 원칙으로 삼았던 것은 시대 상황을 보여주는 일반적인 사진이나 영상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거였습니다. 출연진들의 모습이 유신시대의 한 풍경으로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요. 어떤 시대이든 치열하게 살아낸 한 분 한 분의 삶이 빛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진도 주인공들이 직접 등장하는 사적인 자료를 사용하고 싶었습니다. 기자 분들도 잘 알고 계시겠지만 취재원들이 본인이 가지고 있는, 사적인 기억이 담겨있는 글이나 사진을 내놓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거든요. 그런데 저희가 또 운이 좋았던 게 그때 청계피복노동조합 55인의 국가 폭력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재판이 난항을 겪었던 게 언제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는 인정은 하는데, A라는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는지 입증하는 건 너무 어려운 거예요. 대기업은 직원 명부라도 남아있는데 평화시장은 5명-10명 정도 되는 소규모 작업장이 2천개 정도 있다 보니 작업 명부라는 게 없습니다. 분명히 내가 국가 폭력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존재 증명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재판에 자료를 보강하기 위해 청계피복노동조합에서 사용했던 문건들, 그리고 개인적인 사진을 준비하는 과정에 저희가 함께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재판도 좋은 결과를 얻었고요. 또 저희는 주인공들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기억들에 접근할 수 있는 이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어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회자: 미싱을 ‘한다’라는 표현 대신에 ‘탄다’라는 표현을 써서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제목의 탄생 배경에 대해서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정영 감독: 인터뷰를 했을 때 창신동 꼭대기에서 작업하시는 여성 노동자분이 자기는 미싱을 하지만 자기 아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원단 배달은 한다. 라는 말씀을 한 적이 있었어요. 아들도 자신처럼 미싱을 배워서 미싱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셨는데. 그 말을 듣고 오토바이와 미싱이 겹쳐지면서 미싱을 타고 하을 나는 듯한 느낌을 생각했어요. 그리고 이후에 여성 노동자들을 인터뷰 할 때마다 모두 ‘미싱을 탄다’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이분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말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움직이는 제목을 확정하니까 기적 같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어요. 앞에서 말씀드린 재판도 그렇고, 또 저희가 이걸 찍는 내내 코로나여서 마지막 합창 장면이나 이런 걸 찍을 때도 되게 조심해서 찍었거든요. 그 장면을 찍는데 선생님들이 열심히 해준 것도 너무 고맙고. 아주 사적인 거지만 일면식도 없는 양희은 선생님께 연락을 드려서 영화를 보여드리고 싶다고 초대를 했는데 오늘 보러 오셨어요. 선생님이 딱 만나자 마자 영화 속에 나오는 분들도 공장에 있었지만 똑같은 나이에 나도 일을 했다고, 연대의 마음으로 왔다라고 말씀을 해주시는 거예요. 정말 성덕이 됐고. 이런 기적 같은 일들이 <미싱타는 여자들>이 굴러가면서, ‘이 영화가 스스로 굴러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회자: 이어서 영화에 출연해주신 세 분의 선생님들께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어린 나이부터 노동의 현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어린 나이에 일을 하면서 겪었던 고충이 많으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시절의 이야기를 차례로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숙희: 평화시장의 노동 환경이 너무나 나빴다는 건 기자 선생님들도 다 아실 것 같아요. 15시간, 16시간씩 작업을 하고 한 달에 두 번도 쉬지 못하는, 옷이 잘 팔리는 구정이나 추석에는 공장에서 먹고 자면서 일을 해야 되고. 이런 것들도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그런 것들과 함께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는 거죠. 특히 재단사라는 사람들이 시다들에게 함부로 말을 하거나 잘못을 뒤집어씌우거나, 그래도 마음에 안 들면 손찌검까지 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었기 때문에 힘들었고요. 접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고 밥 먹고 나면 일만 해야 하는 상황들이 힘들었습니다. 백열등 아래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하다 보니까 햇빛이 있는 곳에 가면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던 그런 게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신순애: 저는 2006년도에 초등학교 검정고시부터 시작해서 성공회대 사회학부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학교에 갔더니 나이는 저보다 어리지만 동기들이학교에서 호칭 때문에 토론한 적이 있었어요. 언니라고 부를까 이모라고 부를까, 그래서 이모보다는 언니가가 좋다. 그랬더니 앞에다 왕자를 붙여서 왕언니라고 부르기 했어요. 한 동기가 자기가 [전태일 평전]을 읽으면서 눈물을 너무 흘렸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정작 저는 평전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려본 적은 없거든요. 내가 개인적으로 그렇게 메말라있나?’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그런데 다른 [아리랑], [태백산맥]같은 책을 읽으면서는 많이 울었거든요. ‘우리 선배님들이 이렇게 우리나라를 지켜줬구나’하면서 엉엉 울었는데. ‘그럼 난 왜 전태일 평전을 읽고 왜 눈물이 안 날까?’ 그러면서 다시 읽어봤는데, 평전에 나와 있는 것 보다는 제가 시다 생활할 때가 훨씬 더 힘들었더라고요. 가장 힘들었던 건 생리할 때는 아직도 여전히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생리대가 분명 약국에 있어요. 그런데 돈이 없어서 생리대를 살 수가 없었고요. 얼마 전에 뉴스에서 고등학생이 생리대가 없어서 구두 깔창으로 생리대를 썼다는 뉴스를 보고 내 몸이 굳어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옛날에 16살-17살 생리할 때 공장장 몰래 점퍼 주머니를 생리대로 대신 쓰면 사타구니가 너무 아파서. 그런 아픈 경험들이 있어서 내가 평전을 보고는 눈물이 안났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임미경: 앞에서 언니들이 다 말씀을 주셔서 그 시절이 힘들었던 건 다 아실 것 같고요. 그때는 공장이 굉장히 작았어요. 굉장히 작은데, 다락이 머리에 닿아서 하루 종일 일어설 수가 없었어요. 매일 엎드려서 일을 하고. 그리고 환풍기도 없어서, 그 여름에 선풍기를 아침에 틀어 놓으면 두 시간만 지나도 선풍기 날개가 안 보여요. 날개에 먼지가 껴서. 그때 환풍기 시설이 돌아갈 수가 없었어요. 너무 먼지가 많아서. 정말 숨쉬기조차 힘들었던. 그리고 시다니까 다리미질을 하면 그 원단에서 나는 냄새 그런 것도 진짜 힘들었고 역겨웠어요. 그 시절이 정말 힘들고 어려웠는데, 그래도 생각해보면 정말 열심히 살았다는 생각이 들고, 지금도 어딘가에는 너무 힘들게 사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항상 가슴이 아픕니다.

사회: 민중의 소리 김세운 기자님이 선생님들께 질문해 주셨습니다. 9월 9일에 있었던 일은 지금 들어도 아찔합니다. 어머니들이 다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농성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노동교실을 지키기 위한 이유 이외에도 여러 이유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어머님들을 움직인 원동력은 무엇이었습니까? 라고 질문을 주셨습니다.

이숙희: 영화에도 나와 있지만 노동교실은 그냥 하나의 교실로만 저희들에게 존재했던 게 아닙니다. 계속 일만하던 노동자들에게, 저희들에게 노동교실은 배움터였고요. 또 놀이터였고, 자신을 키워나가는 장이었습니다. 그래서 10시, 11시에 끝나도 꼭 노동교실에 들러서 갔거든요. 그만큼 집보다도 소중한 장소였기 때문에, 절대로 뺏겨서는 안된다라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공통된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가 달려온 것입니다. 다른 큰 회사들은 2교대 3교대 작업을 하기 때문에 금전적 피해를 덜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평화시장은 앞에서 감독님이 말씀하셨듯이 영세한 작업장이 많았기 때문에, 내가 오늘 싸움에 한 번 나간다 그러면 내 일당을 포기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 싸움이 한 번으로 끝날 수도 있고 연속해야 되는 경우도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노동자들의 뭘 재고 생각하지 않고 달려올 수 있었고, 개인이 피해를 감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노동교실을 통해서 내 자신을 발견하고, ‘내가 인격적으로 대우받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달려올 수 있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신순애: 평화시장에 제가 13살에, 1966년도에 7번 시다로 시작해서 노동조합 알기 전까지 제 이름을 단 한번도 제가 말해본 적도 없고 불러본 적도 없습니다. 저는 7번시다 1번 보조, 그 다음에 3번 미싱사 그 다음에 1번 오야 미싱사 그랬는데. 그전에 길에서 만나면 ‘야 7번 시다’, ‘야 1번 오야’ 이렇게 불렸는데. 노동조합 갔더니 신순애라는 이름을 불러줬고요. 제가 1975년도 12월 4일 날 시간 단축 농성에 참석하게 됩니다. 밤에는 약 120명에서 150명 정도 있었는데. 통행금지가 있으니까 하나 둘 빠져나가기 시작해서 밤새고 있을 때는 28명, 어쨌든 28명이서 싸움을 끝까지 했는데. 그 결과로 밤 8시에 공장의 전깃불을 내리는 성과를 얻었습니다. 그때 제가 두번째로 농성을 참석하게 된 거였는데요. 그 기쁨. 해냈다는 기쁨과 공순이가 신순애로 태어나서, 노동자로 다시 태어나서 나와 더불어 계속 개선해 나가는. 그게 최초의 성과였고요. 그 이후로 계속 임금 인상이니 퇴직금 싸움이니 이런 걸 하면서 한 번도 져보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 꿈으로 9월 9일도 두렵지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그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임미경: 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평화시장에 갔어요. 평화시장에 가서 기술을 배우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갔는데, 거기는 언니가 말했다시피 이름이 없어요. 몇 번 시다 이렇게 부르고, 미싱을 탄다는 표현을 했다고 했는데. 미싱을 타기 위해서 시다를 해요. 미싱을 탄다는 거는 시다를 몇 년을 해야 3년에서 길게는 5년을 해야 미싱을 탈 수 있는 거예용. 미싱을 얼른 타고 싶어서 일을 하는데. 요즘은 수당 이런 게 있지만 여기는 15시간 밤일을 해도 급여는 똑같아요. 밤늦게 일을 했으니까 수당을 줄게 이런 거 없어요. 일요일이 휴일 이런 것도 없어요. 그냥 계속 일을 하고 한 달 급여는 똑같았어요. 밤일을 하든 낮일을 하든. 여기는 일찍 끝나는 경우가 절대 없어요. 평화시장은 전력 사정이 안 좋아서 저녁에 불이 자주 나갔어요. 어쩌다 불이 나가면 쉴 수 있어서 좋았는데. 그러면 그날은 더 늦게까지 일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늦게까지 일을 하면 통행금지가 있어서 버스가 끊겨요. 버스가 끊기면 그냥 그 산길을 걸어갔어요. 맨날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그런데 언니들이 시간 단축에 성공했잖아요. 그리고 노조에서 팜플렛이 왔어요. 우리가 공부를 너무 하고 싶지만, 못하고 있었는데 중등과정을 무료로 가르쳐 준다는 그런 팜플렛이 왔어요. 노동교실이 제가 일하던 공장에서 너무 가까운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 가게 됐어요. 맨날 늦게까지 공장에서 일을 하고 집에 가고 반복을 하다가, 노동교실을 알게 되고, 노조를 알게 되고, ‘아 이렇게 하는 건 아니구나’라는 걸 알게 되고. 제가 너무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이건 인간답게 사는 일이 아니야’라는 생각이 계속 드는 거예요. 그때 당시는 대학생들이 많이 와서 야학을 가르쳐 주기도 하고, 또 제가 일을 하니까 근로기준법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고. 노동교실은 그때 당시는 제 생명과도 바꿀 수 있는 곳이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노동교실을 못 가게 차단하고 이렇게 했을 때, 정말 목숨을 던져서라도 노동교실을 꼭 지키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때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판사가 됐든 검사가 됐든 모두가 ‘너네 잘못 없으니까 노동교실 돌려줄게’라고 해주는 줄 알았어요. 그 사람들은 공평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근데 실제는 그렇지 않더라고요.

사회자: 이어서 MBC FM영화음악 김세윤 작가님이 ‘다시 만나 뵙고 싶다고 하신 동료 분들, 결국 만나지 못한 건지 궁금합니다. 앞서 인터뷰에서 뵙지 못한 몇 분이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신 것도 같던데… 혹시 그분들일까요? 함께 어울렸던 다른 동료분들을 더 수소문하셨을 것 같은데… 그 과정과 결과가 궁금합니다.’라고 질문해주셨습니다.

김정영 감독: 이 프로젝트를 할 때 선생님들이 꼭 하시는 말이 영화가 극장에 걸려서 동료들과 연락이 닿았으면 좋겠다. 영화 속에도 비슷한 말이 나오잖아요. ‘동창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고향이 있는 것도 아니고’라는 말이. 그때의 동료들, 동지들이 친구들인데 꼭 보고싶다는 말을 하셨어요. 마지막에 나오는 분들은 인터뷰를 계속 거절하시다가 마지막에 나오신 거였지만. 그분들은 계속 활동을 하고 계신 분들이에요. 선생님들은 99사건 때 무서워서 못 나왔던 친구들이라던지, 청계 노조에서 같이 일했던 모든 분들을 만나고 싶어하세요. 저희 영화가 전국에 개봉을 해서 지방에 사시는 분이든 서울에 사시는 분이든 전태일 재단이나 단체를 통해서 모두 만났으면 좋겠다는 것이 제작진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사회자: 오마이뉴스 이선필 기자님께서 두 가지 질문을 주셨습니다. 먼저, ‘아픔을 돌이키는 게 상처이고, 힘든 일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지금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잊히거나 숨겨졌던 또 다른 아픔을 상기시킴으로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게 하는 힘도 될 것 같습니다. 너무 힘든 여정이었겠지만 영화로 혹시 보람을 느끼시거나 영화 이후 바라는 바가 있는지 궁금합니다.’라고 남겨주셨습니다.

이숙희: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이 영화를 통해서 정말 고생하고 애쓰고 했던, 상처받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고요. 그렇지 못하더라도 전태일 재단이나 전태일 기념관이 있으니 연결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영화에 출연하게 된 임경숙이 있습니다. 임미경하고 인터뷰를 같이 한 친구인데, 영화를 시작하기 직전에 40년 만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또 72년에 초기에 활동했던 분도 만나게 되었는데, 영화에는 같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오랜 시기 동안 고생을 했는데 연락이 안 되는. 제가 올해 나이가 70이 됐거든요. 그리고 기억을 하고 있었더라도 점점 자꾸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동료들이 있습니다. 그 친구들을 모두 다 만나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 영화에 참여했고요. 그 친구들을 하루 빨리 만날 수 있다는 바람을 하고 싶습니다.

사회자: 다음으로 ‘영화에서 다음 전태일 열사는 여성이 돼야 한다는 임미경님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여성 노동자로서 한국 노동운동이 혹시 변화해야 할 지점들이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어떤 말씀을 하기 싶으신지요.’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임미경: 그때 저는 나이가 어려서 ‘이게 노동운동이다’ 이런 건 잘 몰랐어요. 다만 ‘인간답게 살아야겠다’ 이런 생각을 노동교실을 알고부터 생각을 계속 했잖아요. 이런 얘기를 해도 되나 모르겠는데, 그때는 정말 학생들도 많이 참여했어요. 지금은 학생들이 좋은 곳에 취직을 하기에 급하잖아요. 그때는 학생들도 저희들을 도왔다고 해야 되나? 많이 와서 도와주고 이랬습니다. 지금은 너무 세상이 각박해서 그런 건지. 학생들은 학생들 길만 가고, 노동자들은 노동자들의 길만 가고. 어차피 학생이 공부를 마치면 노동자가 되는 거잖아요. 지금은 항상 바람이 있다면 다 같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자기도 노동자로서 길을 갈 거니까. 한마디로 금수저가 아닌 이상은 다 일을 해서 먹고살아야 하잖아요. 일을 해서 먹고사는 건 나만 돈을 많이 벌면 돼 이런 생각 보다 같이 너도 잘 돼고 나도 잘되게 협력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지금 열심히 공부하시는 분들,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시는 분들 모두 전부 하나가 돼서 좋은 세상을 만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사회자: 이어서 연합뉴스 오보람 기자님께서 질문해 주셨습니다. ‘감명 깊게 잘 봤습니다.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며 말을 건네는 후반부 장면이 특히 인상 깊었는데요. 감정이 북받쳐 당시에 못했던 말씀이 있을 듯합니다. 그 시절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그리고 다시 시간을 돌려 그때로 돌아간다면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이 있을지도 궁금합니다.’라고 남겨주셨습니다.

신순애: 저는 제가 99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8시간 시간 단축 농성을 할 때는 사실은 잘 몰랐습니다. 모르고 그냥 노동조합에서 중등 과정 교육을 무료로 해준다고 그러니까 공부하는 재미로 갔는데. 첫 번에 시간 단축 농성을 할 때, 통행 금지가 있으니까 밤을 새고 앉아있었는데. 새벽이 되니까 갑자기 집에서 기다리는 엄마가 걱정되더라고요. 그래서 돌아가신 이소선 어머니한테 집에 잠시 다녀오겠다고 했더니 어머니께서 ‘그럼 아가씨 꼭 갔다가 와요’하더라고요. 그러고 집에 가니까 엄마가 하는 말이 ‘또 어제도 밤샜냐?’ 하시더라고요. 제가 아니라고 말도 못 하고,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어서, 눈을 못 마주치고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오는데. 출근 시간하고 겹친 거예요. 저는 제가 과로와 영양 실조로 쓰러졌을 때도 다음 날 출근하고 그랬거든요. 한 번도 제가 결석을 해본 적이 없는데. 이제 공장으로 갈 시간이잖아요. 공장으로 가야 되는데 이소선 어머니하고 약속한 것도 생각나고. 그때 제가 22살인지 21살인지, 노동조합도 잘 모르고 그랬는데. ‘공장 갈까, 노동교실로 갈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내 몸은 노동교실로 가고 있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어린 나이에 일 밖에 모르던 내가 그렇게 선택했다는 게 칭찬해 주고 싶고요. 지금도 부끄럽지 않게 잘 살고 있어서 제 자신에게 칭찬해 주고 싶습니다.

사회자: 김정영 감독님께 질문드리는데요. 영화에서 아름다운 색감을 자랑하는 초상화가 등장합니다. 해당 작업을 노석미 화가께서 그려 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인연으로 작업을 함께하게 되셨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정영 감독: 노석미 화가는 저의 오랜 지인이에요. 지금 가장 절친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친구인데. 독립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친구한테 부탁하기가 그런 프로젝트잖아요. 그런데 신순애 선생님 책에 담긴 삽화와 노석미 작가의 그림이 화풍이 비슷해요. 그래서 노석미 작가한테 부탁을 했고, 처음에는 저어했지만 나중에 참여하게 됐고. 그렇게 초상화로 작업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선생님들이 되게 힘들고 우울한 나날이었지만, 그 시절의 패션 기술자이기도 하거든요. 과거를 얘기할 때 눈을 반짝이면서 말씀하시는 모습들이 되게 빛나보였어요. 밝은 색깔, 색감 같은 것들로 다시 표현하고 싶었어요. 과거 소녀 시절을 너무 슬픈 모습으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 잘 포착해서 그림을 잘 그려줘서 너무 고마웠죠.

사회자: 인터뷰가 나올 때 흐르는 음악들이 몰입을 도와주는 부분이 있었는데요. 이 OST는 영화 <미성년>의 음악 감독을 맡았던 박성도 음악 감독이 작업해줬다고 들었습니다. 그 과정과 계기에 대해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혁래 감독: 박성도 음악감독은 영화 <미성년>의 음악감독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기타리스트로도 잘 알려진 뮤지션인데요. 미성년의 영화 음악이 굉장히 좋았는데, 영화에 너무 잘 녹여들다보니까 음악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지 않아서 아쉬워하는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여러 인연으로 연결이 돼서 저희 영화의 음악을 맡아 주시게 되었는데요. 저희가 처음에 음악 작업을 할 때 기본 테마 3개를 가지고 영화 음악을 구성하기로 생각했습니다. 2개는 기존에 있던, 출연진 선생님들이 40년 전에 부르던 ‘흔들리지 않게’와 ‘뜻없이 무릎꿇는’ 이 두 가지를 계속 변주하면서 쓰려고 생각했고요. 나머지는 오리지널로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박성도 음악감독과 논의를 해서 진행을 했는데요. 가장 원했던 분위기는 춤곡인데 듣다 보면 스산하고 쓸쓸한, 슬픈 느낌이 들면 좋겠다는 요청을 했습니다. 그 후 두 번 만에 여러분들이 들으신 그 음악을 완성을 해서 너무 만족스럽게 작업을 했습니다. 오프닝 장면은 음악이 나오면서 영화 전체가 완성되기 전에 미리 편집이 다 완성이 됐고, 테마 음악이 오프닝과 임미경 선생님이 ‘제2의 전태일’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리고 엔딩 크레딧에 여러 분위기로 나와서 영화의 분위기를 잘 잡아줘서 저도 연출자로서 만족스러운 부분입니다.

사회자: 강익모 평론가님께서 ‘당시 미싱사, 시다의 급여. 그외 기숙비나 생활비를 어떻게 받으셨는지 궁금합니다.’라고 질문 남겨주셨습니다.

이숙희: 시기별로 좀 다릅니다. 제가 68년도에 평화시장에 들어갔는데요. 저는 하루에 일당 90원을 받았습니다. 전태일씨는 66년도에 들어가서 일당 50원을 받았다고 하는데, 저는 40원을 더 받은 거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달 월급이 2,700원이었다는 거예요. 미싱 보조가 되었을 때 7천원을 받았습니다. 그때 당시 월급으로 받는 미싱사는 만 오천 원 정도 받았던 걸로 기억하고요. 제가 일하던 공장의 친구들이랑 사장에게 면담 요청을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월급을 만 오천 원으로 올려달라고 했더니 사장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지 이렇게 하면 나중에 거지가 돼서 깡통을 차게 될 거야’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때 제가 그때 굉장히 분노했던 기억이 있고요. 그 전에는 일을 너무 열심히 한 번도 빠짐없이 일을 하고 그러니까 ‘우리집 며느리 감이야’ 이런 얘기를 하더니 일한 만큼 월급을 올려달라고 했더니 그런 반응을 해서, 저희에게 굉장히 많은 충격을 줬습니다. 평화시장 들어오기 전부터 노동조합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런 사건이 노동조합에 대한 관심을 더 갖게끔 하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신순애: 저는 첫 월급이 700원이었습니다. 당시 버스 요금이 일반은 10원, 학생이 5원이었습니다. 제가 사회적으로 가장 불평등하다고 느꼈던 게 버스 요금이었습니다. 저는 13살이었는데, 버스요금을 10원을 내고 군대 다녀온 대학생은 회수권 5원내고 다녔어요. 당시 10원이면, 콩나물 10원 어치를 사면 우리 여덟 식구가 하루 종일 반찬으로 먹을 수 있었거든요. 사회적으로 불평등하다고 느꼈던 게 버스요금이었거든요. 그때 제가 칠백 원 받을 때, 미싱사는 많이 받으면 만원에서 만 이천 원, 도급제였기 때문에 부지런히 하고 능수능란하게 하느냐에 따라서 월급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월급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저는 약 1968년 가을 즈음 보조를 타서 그때는 2천 원 정도 받다가, 미싱사가 되서는 제가 삼일 빌딩도 살 수 있을 거라는 꿈을 꿨던 게 제가 미싱을 열심히 해서 만 이천 원을 탄 기억이 있습니다. 년도 별로 기억이 조금 다르고요. 그때 노사 협의를 해서 내 월급봉투가 신순애로 바뀌고 월차수당 생리수당을 최초로 받게 됩니다. 명절에 야간 근무를 해도 시다들은 더 주는 게 없었어요. 저는 미싱사 됐는데 만 이천 원 받았다고 했잖아요. 제가 하도 최고로 열심히 하니까 사장이 가게로 내려오라고 해서 보너스 5백원 받은 적 있고요, 식용유 1.8리터 하나 설탕 3키로 하나입니다.

사회자: 이어서 연합뉴스 오보람 기자님께서 ‘선생님들이 일하시던 1970년대에 비하면 현재 노동 환경은 발전한 게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사각지대에 놓인 노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거창할 수 있겠지만, 그분들을 위해 이 영화가 어떤 역할을 하면 좋겠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라고 질문 남겨 주셨습니다.

이숙희: 이런 얘기를 여쭈시면 곤란한 게 저희가 현재 노동의 현장에서 일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감히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저희가 싸울 수 있었던 이유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였기 때문에, 퇴직금까지 만들었던 게 혼자가 아니라 함꼐였기에 할 수 있었던 거고요. 함께 나아가는 게 제일 먼저가 아닌가 감히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사회: 마지막으로 개봉 소감에 대해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혁래 감독: 얼마 전에 앞선 시사회에서 끝에 계신 임미경 선생님의 아드님이 함께 시사를 보셨어요. 영화를 보시고 나서 어머니께 이런 말씀을 드렸다고 하더라굥. ‘이 영화는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분들에게 보여주면 좋겠어요. 보고나면 힘이 생길 것 같아요’라고 이야기를 하셨다고 하는데. 지금 코로나 때문에 모두가 힘든 시기잖아요. 조금 더 많은 분들이 ‘미싱 타는 여자들’을 보고 힘을 내서 새롭게 시작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정영 감독: 공교롭게도 <태일이>가 개봉을 했었고, 꼬꼬무에서 청계피복노조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고. 그 뒤를 이어서 저희 <미싱타는 여자들>이 개봉을 준비하고 있는데요. <태일이>가 상영이 됐을 때 어떤 고등학생이 엄마한테 전태일 열사가 분신할 때 시위를 하던 여성 노동자들이 없었냐 물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바로 우리 영화를 봐라, 공장에서 일을 했던 그 시다 분들이 나오는 이야기다’라고 말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이 영화가 일련의 애니메이션과 TV, 영화까지. 물론 코로나로 극장 상황이 어렵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기를 바랍니다.

이숙희: 저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우리 영화가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고요. 그래서 우리 옛 조합원들, 평화시장 노동자들, 정말 앞에 있는 사람들은 간간히 어디에 있는지 해명해주지만 그렇지 못한 많은 조합원들과 많은 이들과 연결되기를, ‘내 빛나는 시절도 저기 있구나’라는 위안을 받기를 바랍니다.

신순애: 영화를 찍으면서, 감독님을 보면서 완전 중노동도 이런 중노동이 없다. 어떻게 하면 감독님들을 보상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이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보고 감독님들이 애쓴 것을 보상받았으면 좋겠고요. 두 번째는 저는 저희 영화가 1977년도의 일이지만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인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3D 직종의 분들은 여전히 힘들게 일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나쁜 건 다 1위를 하고 있잖아요. 노동 시간이 가장 길고, 자살도 1위고, 낙태도 1위고. 좋은 쪽 보다는. 그런데 저는 사실 이게 거꾸로 올라가면 70년대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라고 보거든요. 현재 진행형이라고 보기 때문에. 이 영화를 보고 다들 어떻게 하면 더 잘 사는 건지 한 번 더 고민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임미경: 저는 이 영화를 안 찍으려다가 찍은 사람이잖아요. 감춰 놓은 과거를 들춰놓은 거기 때문에. 저는 이 영화를 여러 번 봤어요. 내가 내 영화를 보고 우는 게 너무 기분 나쁜데. 정말 보이지 않은 곳에서 우리나라를 위해서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사람들이 보고 알았으면 좋겠어요. 한 명 한 명이 다 소중하다는 것을 알면서, 힘내고 열심히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이 영화를 꼭 봐야 돼요. 힘을 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자기주장을 확실히 할 수 있고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끝)

언론/배급 시사회 및 VIP 시사회를 성료하며 언론과 평단, 그리고 각계각층 인사들의 극찬을 이끌고 있는 <미싱타는 여자들>은 오는 1월 20일 개봉하여 관객과 만난다.

포스터= 미싱타는 여자들(Sewing Sisters)
포스터= 미싱타는 여자들(Sewing Sis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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