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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컷= 헤어질 결심
스틸 컷= 헤어질 결심

 

영화를 보면 알게 되겠지만 이는 다른 말로 ‘사랑할 결심’이다.

강박증과 직업의식에 높은 프라이드를 가진 남자주인공 형사 해준(박해일). 중국인으로 나이 많은 한국 남자와 결혼해 추방당하지 않기 위해 남편의 폭력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던 여주인공 서래(탕웨이).

어느 날 서래의 남편이 높은 산 위에서 떨어져 죽고 그녀는 마침내. 라는 말로 남편의 죽음에 모호한 암시의 단어를 남긴다. 그건 순전히 서래의 서툰 한국말 때문인 것 같지만 동시에 남편에 대한 서래의 양가적 감정이 투사된 단어다.

 

형사 해준이 그것을 놓칠 리가 없다.

스틸 컷= 헤어질 결심
스틸 컷= 헤어질 결심

마침내. 심장을 가져다줘… 등등 종종 서래가 쓰는 단어들은 굉장히 직접적인 동시에 그래서 순박하고 동시에 자극적이며 아름답기까지 하다. 단순히 한국어를 잘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실상 서래의 단어는 그녀의 심리를 아주 미세하게 드러내고 있는 하나의 장치이자 표징이다. 감독이 서래라는 여성을 한국인이 아닌 중국인으로 설정한 것 자체가 이미 의도된 것임을 말해준다.

자기 직업에 높은 윤리의식과 자부심을 가진 해준이 서래의 진술에 속아서 그녀를 용의 선상에서 제외하고 사건을 자살로 매듭지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게 되었을 때, 그는 그야말로 자신이 완전히 ‘붕괴’되었다고 느낀다.

완벽주의에 강박증까지 가진 해준에게 그것은 자기 삶에 크나큰 오점으로 남았고 그는 그런 자신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한다. 자신을 그저 한낱 여자에게 속은 무능하고 한심한 인간으로 규정짓는다. 그래서 말한다.

“나는 당신 때문에 완전히 붕괴되었다”고.

이는 다시 말해 당신으로 인해 그동안 내가 살아온 방식, 나만의 신념, 나만의 기준이 모두 무너져 내린 것이라는 고백이다. 사랑은 이런 것이다. 내가 굳게 믿었던 것들, 나만의 기준과 틀이 모두 무너져 내릴 수 있을 만큼 자신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는 것. 정신을 차리고 나왔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달라져 있는 것. 해준이 말한 ‘붕괴’는 사랑의 한 속성인 동시에 해준과 같은 성향은 쉽게 용납하기 힘든 마음이다.

해준은 불면증을 앓지만, 아내 없이 혼자서도 큰 외로움을 느끼지 않고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해준에게 서래는 소용돌이처럼 휘몰아 들어온 존재가 아니라 어느새 잉크처럼 서서히 퍼져 들어온 존재다. 해준 자신도 눈치챌 수 없을 만큼. 그렇게 해준의 견고한 벽은 조금씩 허물어졌고 마침내 붕괴 되었다.

 

그는 말한다.

“핸드폰을 물속에 버려요. 아무도 찾지 못하게 멀리 버려요.”

이 말은 서래에게 이렇게 다가왔을 것이다.

 

지금껏 고수한 나의 모든 신념이 당신으로 인해 무너졌고 이제 당신을 지킬 수밖에 없는...그런 내가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해줄 수밖에 없는 일이예요.

“그러니 핸드폰을 버려요. 아무도 모르는 곳에 깊이 버려요.”

 

해준의 이 말을 서래는 알아듣는다. 그래서 말한다.

당신이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요.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요? 해준은 대꾸한다.

해준의 말 속에 담긴 사랑의 의미를 서래만은 알아듣는다.

스틸 컷= 헤어질 결심
스틸 컷= 헤어질 결심

그렇다. 물속에 아무도 모르게 버리라는 말은 당신을 사랑한다는 그래서 더는 당신의 죄를 들추지 못한다는 해준의 명백한 사랑 고백이었다. 서래는 그 마음을 읽은 것이다.

이후 허탈감에 빠져 해준은 서래를 떠나고 서래는 떠난 해준을 오래 잊지 못하다가 이제는 그를 잊고 그와 헤어질 결심을 하기 위해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 그래서 이 <헤어질 결심>이란 사실상 그를 잊기 위한 <사랑의 결심>인 것이다. 역설의 역설이 또 한 번 작용한다.

서래는 중국으로 추방당하지 않기 위해 남편이 필요하고 남자들의 힘이 필요하다. 힘없는 약자인 서래는 그래서 해준이 붕괴라는 단어를 썼을 때 그 의미를 어쩌면 더 확대해서 받아들였을 것이다. 자기 삶의 붕괴는 추방당하는 것이고 그것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니 해준이 말한 붕괴란 그야말로 삶이 다 끝난 것이라고 서래는 추측했을 것이다.

하지만 해준은 다시 새로운 곳으로 파견을 나가고 아내와 합가를 하고 그럭저럭 아내와 작은 일상의 시간들을 보낸다.

서래는 해준의 붕괴가 자신으로 인해 벌어졌고 그의 고통에 대한 미안함과 그가 보여준 사랑을 어떤 식으로든 갚고 싶어 자신의 핸드폰을 찾아와 다시 수사할 것을 요청한다.

서래의 이 요청은 해준에게는 ‘내가 그렇게 만만하냐’ 라는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으나 서래는 자신을 만나기 전으로 해준의 모든 것을 되돌리고 싶어 하는, 그래서 그런 자신이 ‘그렇게 나쁜 거냐’고 묻는다.

이들은 잉크 방울이 물에 퍼지듯 서서히 서로에게 스며들었고 마침내 사랑하게 되었으나 이제는 확실하게 어긋나 있다.

자신 때문에 붕괴된 해준을 자신을 만나기 전으로 되돌아가게 할수만 있다면 자신은 죗값을 치르고 감옥에 가겠다는 서래의 이 마음은 해준의 사랑 고백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인 동시에 해준이 말한 ‘붕괴’가 서래에게는 해준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진폭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를 만나 모든 것을 바로 잡고 싶어서 서래는 그가 있는 곳으로 이사를 오고 또 한 번의 살인사건에 가담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서래는 말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을 만날 방법이 없었다고.

서래는 이제 중국으로의 추방이나 이혼이 문제가 아니다.

스틸 컷= 헤어질 결심
스틸 컷= 헤어질 결심

그녀는 해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자신이 붕괴시키고 훼손시킨 남자에게 이제는 자신의 모든 것이 붕괴될 것을 각오했다. 그것은 죽음도 불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핸드폰을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 깊이 버리라고 했던 것처럼 해준 인생에 오점으로 남은 서래는 자신을 스스로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 버린다. 스스로를 묻어버린다. 그것만이 자신의 죄를 사랑으로 지켜준 해준에 대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이라고 그녀는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상 진정한 삶의 붕괴는 해준이 아니라 서래에게 왔으며 해준에게 붕괴란 자기 삶을 견고히 지키고 있던 도덕관념과 직업윤리 자기신념이라고 하는 한낱 관념적 의미들의 붕괴였다면 서래에게 붕괴란 자기 목숨까지 모두 내어놓는 진정한 사랑에의 투신이었다.

박찬욱 감독은 이번 영화를 통해 여성성을 더욱 부각시키고자 했다. 때로는 인간이 쌓아놓은 질서와 관념이 모두 무너지는 것이 사랑의 한 속성이며 그것을 받아 들이지 못한 남성의 사랑과 그걸 온몸으로 받아낸 여성의 사랑을 아주 대조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의 여운이 길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관념적 사랑과 실존하는 사랑의 충돌, 그리고 뒤늦은 깨달음, 혼돈과 갈등 속에 서로에게 천천히 스며들었던 두 남녀의 마음이 때로는 잔혹한 사랑의 속성에 배신당하고 허무하게 끝나버릴 수 밖에 없는 것.

이것이 사랑의 본질임을 그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알아들은 관객은 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헤어질 결심은 가슴속 파고 높던 바다와 희미한 안개마저 걷혀버리고 모든 것이 빠져나가 버린 뒤, 허무하고 쓸쓸하게 남은 사랑에 대한 가장 명징한 이야기였다.

바로 진정한 사랑의 이야기였다.

스틸 컷= 헤어질 결심
스틸 컷= 헤어질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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