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0년 인류위기의 순간에 사랑을 외치다

당신이 <매트릭스>에서 선택을 해야 하다면 빨간약과 파란약 중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1999년 개봉된 매트릭스는 당시에는 충격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현실과 닮아가고 있다.

연극 <언택트 커넥션>은 1인 격리 세상을 맞은 2070년이 배경이다.

코로나 팬데믹보다 더한 전염병이 퍼진 현실에 생존 대안이 된 매트릭스같은 가상 현실은 <언택트 커넥션>

 

연극 언택트 커넥션
연극 언택트 커넥션


연극 카피문구는

나, 진짜 당신을 만나러 갈게

“진짜” 당신, “진짜” 인간, “진짜” 삶에 대한 고민이 바탕이 된 작품은 인류 종말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만남과 마음, 그 순간에 분비되는 사랑의 호르몬, 옥시토신으로 제시한다.

바이러스가 퍼진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한 방편으로 1인 격리를 시작한 지 20년째. 인간들은 탈출을 시도하고 인공지능 휴머노이드는 인간들을 추격하고 사살한다. 생존하기 위해 컨테이너박스에 갇혀 살다가 죽거나, 탈출해서 사살되거나 둘 중 하나인 세상이다.

타인과의 접촉이 유일하게 허락된 가상공간 <언택트 커넥션>은 자신이 원하는 외모와 나이로 살아간다. 영화 <아바타>를 떠올려도 좋고, 코로나 팬데믹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회의 모습이나 아이들의 새로운 놀이터 로블록스를 떠올려도 좋다.

연극의 첫 장면은 로봇에게 총을 맞고 절규하며 죽어가는 한 남자로 시작된다.

1인 격리와 가상세계로부터 탈출한 남자의 마지막 외침은

“나는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그저 살고 싶을 뿐이라고’ 다.

살고 싶어서 나와서 죽는다고?

현실에서 컨택트를 하더라도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는 인류가 있다는 걸 숨기는 시스템 관리자는, 게임개발자이면서 컴퓨터 박사 진태! 진태가 가상세계와 1인 격리에서 인간들을 풀어주지 않는 건,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자신의 상실감 때문이다.

결국 자신의 분노를 전인류에게 폭발시키는 진태는 인류를 멸종시키고 인공지능만 남기겠다는 목표를 가졌다. 내가 잃었으니 너희도 잃어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진태의 부하이자 인공지능인 민도는 의식이 생겨버린 휴머노이드다.

 

연극 언택트 커넥션
연극 언택트 커넥션

 

로봇이 박사에게 묻는다.

인간멸종이 목적이라면 바이러스에 감염되게 두면 어차피 죽을 텐데, 왜 살려두고 다시 자유로울 수 있을 거라고 거짓말을 하냐고” 진태의 대답은 “희망을 가진 자의 절망은 더 절망스럽기 때문”이라는 저주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갖게 한 후에 절대 만나지 못한 채 죽게 만드는 가장 절망적인 형벌을 택한 것이다. 결국 박사의 <언택트 커넥션>은 인류의 구원이 아니라 인류 종말이 목적이다.

작품의 러닝타임 대부분은, 만나고 싶다는 아내와 안된다는 남편의 언쟁이 반복된다.

현실에서는 중년 부부지만 이들도 <언택트 커넥션>안에서는 20대의 모습을 가졌고, 서로 “진짜” 모습을 잊어간다.

밝고 쾌활한 장면이 전혀 없고, 내내 무겁고 진지한 장면들과 전개라 무대는 전반적으로 우울하고 무겁게 흘러간다. 관객에게는 신선한 고민거리를 안겨줄 수도 있고, 불편함을 견디는 시간일 수도 있다.

고백도 연락도 심지어 결별도 SNS로 하는 신인류이고, 직접 통화하는 것도 두려워한다는 전화공포증(폰포비아)을 겪는 시대인데, 당신을 직접 만나고 싶다는 인물의 반복적인 외침이 낯설고 조금은 불편한 문제의식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굳이? 왜? 라는 생각도 가능할 것이다.

 

연극 언택트 커넥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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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넘어서 다시 인간으로

위기의 순간, 지켜야할 인류보편적 가치는 무엇인가를 고민한 원작자 김성진은 이 작품으로 전염병과 사회,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 생존과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고 했다.

온기와 촉감은 상실된 세상 <언택트 커넥션>과 팬데믹 시절에 우리에게 익숙해진 랜선** 이란 개념은 궤를 같이 한다.

랜선 집들이, 랜선 여행, 랜선 박물관 투어, 랜선 회의 등 랜선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봉쇄가 풀리고 이동이 자유로워지면서 인간은 자신의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현실투어를 시작했다. 이것을 보면 가상현실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랜선은 시각과 청각을 충족시키지만, 결국 그보다 깊은 자극과 감동을 갈망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인간의 감각에 대해 불교를 차용해보자.

감각기관에 대해 불교에서는 6가지 층위로 나눈다.

안이비설신의(眼耳費舌身意)

눈, 귀, 코, 입, 몸, 뜻으로 감각의 깊이로도 구분된다. 우리의 감각 중에서 가장 먼저 혹하기 쉬운 것이 보는 것이고, 가장 깊은 것은 의식이다.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느끼는 것들이 쌓인 것이 의식이라고 풀이된다.

보고 듣는 것을 넘어서는 감각의 다음 단계, 우리는 서로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서로 껴안고, 위로하고 싶을 때는 손이나 등을 쓰다듬는다. 냄새는 우리가 공감각적으로 느끼기 때문에 비중을 두지 않지만, 소설 <향수>를 보면 냄새없는 인간을 유령으로 치부하는 것만 봐도 아주 중요하고 깊은 감각인 걸 알 수 있다.

사랑하는 이들의 ‘보고싶다’는 고백은 실상은 보는 것 이상의 표현이다. 5감으로 느끼고 싶다는 다른 표현인 셈이다. 이런 갈증은 비대면만남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다.

그래서 안전한 가상공간 <언택트 커넥션> 안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하는 것이고, 네오는 빨간약을 선택한 것이리라.   

만날 수 있다는 희망만 품고 죽을 때까지 괴로워하면서 모든 인간의 멸종을 꿈꾸던 진태는 결국자살하고, 의식을 가져버린 AI휴머노이드는 로봇에게 금지된 자의식으로 자폭을 한다.

그럼 탈출을 꿈꾸고 실행에 옮긴 노부부는 어찌 됐을까?

작품은 끝이나고 새로운 문제의식이 시작된다.

“진짜”인간, “진짜”존재, “진짜”삶은 무엇일까? 라는 고민을 시작으로 결론은 사랑, 만나고 만지고 마음을 주고 받으며 나오는 사랑의 호르몬, 옥시토신을 대안으로 꼽은 작가의 결말이 안일하다.

결국 모든 것이 뒤엉킨 결론

인공지능은 자아를 갖게 돼서 스스로 자폭을 하게 되고, 두 중년 부부는 몸은 죽고 아바타는 본래 자신의 외모를 찾아가며 <언택트 커넥션> 안에서 온기와 촉감까지 되찾아 평온한 일상을 살아간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작품 내내 무겁고 결말까지 허무하면 관객에게 너무 미안해서일까? 해피하지 않은 상황에서 굳이해피엔딩을 연출하지만, 과연 해피한 결말인 걸까 되물어야 한다.

바이러스를 이기는 인간의 면역은 옥시토신, 생존의 관건이 사랑하는 순간에 뿜어져 나오는 사라져가는 호르몬이라 해놓고, 작품의 결말은 아바타들이 인간의 의식과 외모를 가지고 <언택트 커넥션> 안에서 행복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놓다니.

이것은 매트릭스 안에서 파란약을 먹은 네오가 행복했다는 결론이 아닌가.

인간의 본질이 의식이라는 결론이고, 느낄 수만 있다면 신체는 프로그램 안에서 생성되어도 좋다는 결론이라 위험해 보인다.

우리의 정신은 우리의 신체와 구별될 수 없다.

조던 필 감독의 영화 <겟아웃>에서 흑인의 몸을 훔쳐 늙은 백인이 정신을 이양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인정하는 경우와 다를 게 무언가.

한국영화 윤인호 감독의 <더게임> 속 신하균과 변희봉처럼 몸을 빼앗길 수도 빼앗을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하는 걸까?

타인의 몸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 안에서 만들어진 나의 아바타이기에 괜찮다는 말은 작품의 제작 취지인 만질 수 없으면 마음을 느낄 수 없다는 기본 논조를 벗어난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

시대 고민을 반영한 문제의식과 현실감있는 고민은 깊이 공감하지만, “진짜”를 찾기위한 여정 끝에 급한 마무리를 지은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연극 언택트 커넥션
연극 언택트 커넥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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