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 컷= 혜옥이
스틸 컷= 혜옥이

 

제47회 서울독립영화제를 사로잡은 하이퍼리얼 패닉 아트버스터 <혜옥이>가 영화 연출을 맡은 박정환 감독의 인터뷰를 공개했다.

<혜옥이>는 명문대를 졸업하고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혜옥이>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가 공감하고 이입할 수 있는 주제를 독특한 감성과 다양한 관점 그리고 미장센으로 풀어가며 공포영화보다 더 무서운 현실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사진= 박정환 감독
사진= 박정환 감독

 

[박정환 감독 인터뷰]

Q. 영화 <혜옥이>의 시작에 대해

A.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 나는 입봉하지 못하는 나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 약간 코믹한 부분을 가미해서 말이다. 하지만 시놉시스를 친누나인 피디님에게 보여줬을 때 아무도 너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면서 조금 더 보편적인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다.

그렇게 어떤 이야기를 쓸까 고민을 하면서 핸드폰을 하던 와중에 6년 동안 고시 준비를 했던 친구가 올린 SNS 사진을 보게 되었다. 그 사진에는 그 친구가 공부하면서 붙여 놓은 무수히 많은 포스트잇이 담겨 있었는데 그게 영화에서 반복적인 이미지로 나오는 포스트잇의 시초가 되었다.

항상 장편영화 입봉 하는 게 고시 준비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던 나로서는 고시생의 그릇 안에 나의 자전적인 감정을 담기가 매우 적절했다. 바로 고시 준비를 했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시나리오 쓰는데 합류를 해달라고 했다.

봉준호 감독님께서 스콜세지 감독님의 어록을 수상소감에서 인용하신 것처럼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는 것을 필자도 인지하고 있었기에 본인의 가장 개인적인 감정과 친구의 가장 개인적인 경험이 섞여 이러한 창작물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나 싶다.

스틸 컷= 혜옥이
스틸 컷= 혜옥이

 

Q. <혜옥이>의 제목과 주인공의 이름에 대한 에피소드에 대해

A. <혜옥이>라는 제목에는 두 명의 인물이 내포되어 있다. 혜옥이라는 당사자와 혜옥이를 부르는 타자. 라엘과 라엘의 엄마. 즉 두 주인공을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는 데 있어 <혜옥이>보다 더 좋은 단어가 있나 싶다. <혜옥이>라는 제목에는 단순히 두 주인공을 넘어서 모녀의 관계 및 라엘의 엄마의 비뚤어진 욕망까지 내포되어 있다.

또한, 주인공의 이름은 기독교적인 이름으로 가고 싶었다. 그 와중에 라푼젤이라는 이름을 최대한 살리고 싶었다. 성안에 갇힌 라푼젤과 마녀의 이미지가 모녀를 관통하는 이미지로 쓰였기 때문이다. 두 가지 니즈를 충족시키는 이름이 라헬이었다.

야곱의 아내인 라헬은 배반을 상징하는 인물로 성경에서 표현된다. 모태 신앙인 주인공이 기독교적인 이름을 버리고 하나님한테 벌을 받는다는 식으로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 라헬이라는 이름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라헬에서 조금 더 모던한 라엘로 이름을 다듬었다.

종교의 충돌 또한 염두에 둔 부분이었기에 주인공의 엄마가 개명해서 가지고 오는 이름은 불교적이어야 했다. 그리고 매우 촌스러워야 했다. 어떤 이름이 잘 어울릴까 고민하다가 친누나인 피디님의 어릴 적 이름이 떠올랐다.

처음 그 이름이 뇌리에 스쳤을 때 나도 모르게 "혜옥아!"를 외쳤다. 피디님은 혜옥이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을 한 거지만 딸의 동의 없이 딸의 이름을 세상 올드한 그것으로 개명하는 행동이 라엘의 엄마의 욕망을 더 두드러지게 보여주기에 너무 마음에 드는 이름이었다.

 

Q. 캐스팅 과정에 대해

A. 이태경 배우님과 항상 같이 작업을 하고 싶었다. <죄 많은 소녀>로 인사를 드리게 되었고 이태경 배우 전 뿐만 아니라 상영하는 모든 영화를 영화제에서 모니터링하면서 어떤 작품이 배우님과 가장 잘 어울릴까 고민을 많이 했었다. 그래서 이번 작품도 이태경 배우님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역시나 이태경 배우님이 혜옥이라는 캐릭터를 안 해줬더라면 다른 대안이 생각이 안날 정도로 너무 캐릭터에 잘 녹아들어 가서 감사했다. 전국향 선생님은 대학로에서 포스터 및 스틸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선배에게 시나리오를 보냈고 전국향 선생님을 추천받아 만나 뵙게 되었다.

선생님께서는 이메일로 시나리오를 받아 읽어 보시곤 흔쾌히 같이 작업해 주시기로 하셨고, 처음 선생님과 <혜옥이> 리딩 할 때의 그 전율은 정말 아직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정상우 배우님은 원래 친분이 있던 사이였다.

정상우 배우는 음악감독이지만 연기를 하고 싶어 했고 나는 영화를 찍고 싶어서 만나면 항상 영화 이야기만 하던 사이였다. 그러다 이번 시나리오에서 다른 사람보다 정상우 배우가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캐릭터를 시나리오에 넣어봤다.

스틸 컷= 혜옥이
스틸 컷= 혜옥이

 

Q. 혜옥, 엄마 인물과 캐릭터 설정 그리고 그 설정에 대한 이유에 대해

A. 캐릭터 설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왜 엄마가 그렇게 공무원에 집착을 할까? 였다. 그 질문에 있어서 가까운 지인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실타래를 풀어봤다.

IMF 때 집안이 망하고 난 후 일하지 않는 아빠와 자식한테 집착하는 엄마. 그리고 IMF 시절 망한 경험 때문에 안정성에 집착을 해서 자식에게 공무원을 강요하는 엄마. 그리고 안정성을 위해 딸을 불안정성의 상황으로 계속 몰고 가는 아이러니한 부분을 영화에서 표현해 주고 싶었다.

아이러니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도박을 했던 전 남편의 모습을 끔찍이 싫어하는 엄마가 정작 딸의 인생을 가지고 도박을 하고 있는 모습을 추가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당연히 그러한 엄마와 함께 사는 딸의 성격은 수동성이 디폴트여야 했다.

극을 풀어가는 데 있어 주인공이 수동적인 것은 매우 큰 핸디캡이 되지만 수동적인 주인공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가는 것이 필자의 가장 큰 숙제였던 것 같다.

 

Q. 혜옥과 엄마의 관계성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에 대해

A. 제목 <혜옥이>로 잠깐 돌아오자면 <혜옥이>에 라엘은 존재하지 않고 혜옥이라고 부르는 엄마만이 존재한다. 정체성의 상실. 주체성의 결핍. 삶의 목적이 오로지 타인의 욕망을 위해 존재하는 우리 안에 갇힌 돼지의 모습이 영화 인트로에 등장하는 부분도 같은 맥락이다.

IMF 이후로 해체된 가족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IMF 이후 더 끈끈해진 모녀의 관계. 하지만 분리되지 않은 두 사람. 그렇기에 처음에는 응원을 해주는 든든한 엄마의 존재가 점점 더 억압과 부담의 존재로 보이는 것이 중요했다.

엄마로부터 분리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라엘. 그래서 두 사람이 더욱더 가까워질수록 더욱더 멀어지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가장 솔직하지 못한 게 가족’이 되어버리는 과정을 말이다. 그렇기에 극에서 라엘의 목표는 해방이었다. 엄마로부터의 해방. 이 공간 안에서의 해방. 라푼젤의 이미지가 극에서 중요했던 부분도 이러한 부분과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비뚤어진 관계에서 진정한 해방이 이루어지려면 라엘이 엄마에게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져야 된다고 생각했다. 자의적으로 그렇게 할 수 없는 캐릭터이기에 마지막에 엄마와 조우했을 때 그 상황 자체는 관객에게 공포스럽게 다가올 수 있다고 한들 해방이 이루어지기 위해 꼭 불가피한 트리거라고 믿는다.

스틸 컷= 혜옥이
스틸 컷= 혜옥이

 

Q. 혜옥의 시선으로 어떤 것을 느끼게 하고 싶었는지

A. 혜옥의 시선으로 관객과 교감하고 싶었던 부분은 최대한 라엘과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 트라우마적인 경험을 상기시켜주고 싶었다. 트라우마 치료에 있어서 트라우마를 의식적으로 끄집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개인적인 아픔을 같이 겪었던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고 다시 한 번 아파했으면 좋겠다는 의도가 있었다. 그렇기에 어쭙잖은 위로는 하고 싶지 않았다. 같이 아파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별할 때 신나는 음악보다 애처로운 발라드 음악을 찾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힘들수록 우리의 힘든 감정을 대변해 주는 매체를 찾으며 그 감정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해소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들이 겪었던 아픔을 다시 한 번 같이 아파하고 나만이 아팠던 것이 아니라는 부분에서 혜옥이의 시선을 통해 스스로 위로받기를 원했다.

 

Q. 독특한 미장센에 대해

A. 너무 많아서 딱 두 가지로만 요약해야 할 것 같다. 첫 번째로는 상하의 관계다. 신림동의 고시촌에 언덕이 있다는 것이 정말 럭키하다고 생각했다. 일예로 <기생충>에서는 사회적 위치를 물리적인 상하의 관계와 정비례하게 배치했다. 그리고 높은 곳은 권력을 상징하는 것이 맞다.

아파트에서 가장 비싼 곳도 펜트하우스 아닌가. 하지만 한국에서는 고유적으로 가난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반 지하뿐만 아니라 옥탑방이 있다는 것에 동의해 주었으면 한다. 특히 한국에 가난을 상징하는 장소로는 달동네가 있다.

달동네에 위치한 옥탑방에서 보이는 서울 야경은 정말 내가 펜트하우스에서 살고 있다는 착각을 준다. 혜옥의 엄마가 자취방에서 창문 밖을 바라볼 때 보이는 그 표정은 혜옥이 이 자취방에서 살면 무조건 권력을 쟁취할 거라는 착각을 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렇기 때문에 바깥 풍경을 보여주지 않고 표정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연출적인 부분이 강하다. 판옵티콘처럼 위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권력을 상징하기에 엄마가 혜옥을 자취방에 가둬 높은 곳에 고립시키는 라푼젤의 오마주가 엄마의 욕망의 상징성을 극대화한다.

고시촌이 이러한 언덕에 있는 것도 어떻게 보면 우연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 두 번째로 이야기하고 싶은 미장센은 자충수다. 혜옥이 시험을 볼 때 유심히 보면 다들 흰색 아니면 검은색 옷을 입고 있다. 바둑판을 연상했다.

그리고 검은색 옷을 입은 시험관이 혜옥의 자리에 오면 자충수가 발현된다. 이러한 연출을 극대화하기 위해 혜옥의 겉옷은 검은색으로 입히고 고깃집에서는 흰색 옷을 입혔다. 검은 돌이 아닌 흰 돌로 새로운 게임을 시작하는 혜옥을 상징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렇게 숨겨둔 연출 의도를 다시 상기시켜 이 영화는 해피엔딩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스틸 컷= 혜옥이
스틸 컷= 혜옥이

 

Q. <혜옥이> 개봉 소감과 관객들에게 어떻게 다가가기를 바라는지

A. 포스트잇 한 장으로 시작해 이렇게 관객들을 만나니 정말 인생사 새옹지마다. 진심으로 같이 아파하고 힘들어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훌훌 털어내고 다음 게임을 시작할 수 있다.

인생은 죽기 전까지 끝없는 라운드의 연속이고, 몇 번 졌다고 너무 낙심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최선을 다해 졌으면 괜찮은 것이다. 다음 판을 이기기 위해 져 준 것뿐이니까.

 

포스터= 혜옥이
포스터= 혜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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