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도는 기억으로, 기억은 삶으로
- 서정적인 은유, 마음을 울리는 메시지, 완벽하게 어울리는 OST
- 신카이 마코토 감독 4년만의 귀환

​스틸 컷= 스즈메의 문단속​
​스틸 컷= 스즈메의 문단속​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날씨의 아이>에 이어 4년 만에 신작 <스즈메의 문단속>으로 돌아왔다. 일본에서는 지난해 11월에 개봉이 되어 이미 천만 관객을 넘었다고 하니 감독의 팬 층이 두터운 한국에서도 신작에 대한 기대감 또한 높을 수밖에 없다.

이제는 오래 전 이야기가 되기는 했지만 감독의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라는 5분짜리 초 단편 애니메이션을 우연히 본 후부터 그의 열렬한 팬이 되었고, 그 후 지금까지 나의 기대가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행보를 걸어온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작품마다 흥행에 성공해 이제는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라 불리며 명실공히 일본을 대표하는 애니메이션 감독임을 부정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을 관통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섬세한 배경 묘사, 빛을 쓰는 방식의 수려함, 곳곳에 담긴 서정적인 은유, 마음을 울리는 메시지, 작품과 완벽하게 어울리는 OST 등이 그러하다. 이번 신작 <스즈메의 문단속>에서도 그런 신카이식 언어는 여전하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한 마디로 메시지는 확실하고, 스케일은 더욱 커졌으며, 시각적인 아름다움이 폭발하는 작품이다. 어째서 시사회를 IMAX관에서 해야만 했는지 보는 내내 납득했다고나 할까. 장면 장면이 너무 아름다워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스틸 컷= 스즈메의 문단속​
​스틸 컷= 스즈메의 문단속​

<스즈메의 문단속>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3월 11일이다. 일본인에게 있어 3월 11일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짜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토호쿠(동북부) 태평양 연안에서 진도 9.1의 거대 지진이 발생해, 일본 국내 지진 관측 역사상 최고 규모를 기록한다.

또한 지진이 초래한 초대형 쓰나미로 인해 대규모 인적, 물적 피해뿐 아니라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라는 대참사가 일어난다. 일본 사회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수습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사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로선 4월 16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믿어지지 않는 사건 앞에서 분명 무언가 원인(혹은 음모)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어쩌면 그런 게 있어야만 한다고 여기는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고선 현실을 받아들이고 견디는 일이 힘드니까.

세계가 산산이 부서지는 것만 같은 혼란 속에서 제대로 된 애도의 시간조차 나누지 못 한 이들은 내내 고통에 시달린다. 살아남은 것이 죄는 아닐진 데 죄인의 마음이 된다. 돌이킬 수 없다면 정확한 이유만이라도 알고 싶다고.

스틸 컷= 스즈메의 문단속
스틸 컷= 스즈메의 문단속

 

애도란 무엇일까?

어떻게 하는 것이 제대로 된 애도일까?

 

영화는 이런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주인공 스즈메와 소타가 일본 곳곳을 돌며 하는 문단속은 단절과 폐쇄가 아닌 기억과 극복의 의식에 다름 아니다. 예기치 못 한 비극으로 삶과 가족을 빼앗긴 영혼을 가두고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기억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진짜 애도이자 그래야 앞으로의 삶이 이어진다고 말이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오늘 저녁 메뉴는 된장찌개야, 퇴근 후 한 잔 어때? 우리가 매일 같이 당연하게 주고받던 말들이 얼마나 소중한 힘을 지니고 있는지 빼앗겨보기 전까지는 실감하지 못한다. 상실을 인정하고 수용하기까지 가장 필요한 것은 기다림, 즉 시간이다.

이별을 경험한 이들은 때로 방어적으로 애도를 하지 않거나 애도 반응의 기간을 연장시키려는 시도를 하는데, 볼칸(Volkan)은 이를 ‘대상과의 연결 됨’을 통해 대상의 표상을 영구히 간직하려는 시도라 했다.

주인공 스즈메는 3월 11일의 재난으로 엄마를 잃었으나,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한 상태로 열일곱 살이 된다. 불과 아침까지도 보았던 엄마의 얼굴을 갑자기, 영영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엄마는 스즈메가 열일곱이 된 후에도 여전히 네 살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스틸 컷= 스즈메의 문단속​
​스틸 컷= 스즈메의 문단속​

스즈메는 줄곧 꿈속에서 잃어버린 엄마를 찾아 헤맨다. 꿈은 그녀에게 있어 엄마가 존재하는 다른 세상이지만 실재하는 세계처럼 생생하다. 그 세계는 정말 있는 곳일까? 혹은 존재하길 바라는 간절함이 만든 환상일까? 어쩌면 4월 16일을 경험한 우리들도 스즈메의 심정과 다르지 않을 테다.

그 사람이 내 곁에 있지 않아도 정말 그런 세상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망각이 애도일 리 없다. 아니 망각이어서는 안 된다. 기억을 기억하는 행위는 상처의 딱지를 억지로 떼내는 일이 아니다. 그날의 목소리를 하루라도 더 기억하는 것, 존재했음을 잊지 않는 것, 다시는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더 열심히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산 자의 할 일이 아닐까?

 

<스즈메의 문단속>은 한 편의 거대한 애도다.

 

그리고 덧붙여 말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 숲>에서 그랬듯, 죽음은 삶의 대극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담겨있다고. 이 문장은 삶과 죽음에 대한 회의가 결코 아닌 지금 살아있는, 살아남은 우리의 더 오래 살고 싶다는 지향이다. 애도는 기억이고, 기억은 삶으로 이어진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의 진짜 의미는, 더 오래 살아서 기억으로 애도하겠다는 생의 의지다. 죽음이 가장 두려운 이유는 존재의 사라짐 자체가 아니라 잊혀짐이 아닌가. 우리는 아직 충분한 애도의 시간을 갖지 못했다.

​스틸 컷= 스즈메의 문단속​
​스틸 컷= 스즈메의 문단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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