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터= 비밀의 언덕
포스터= 비밀의 언덕

 

주인공 명은은 욕심 많은 열두 살 소녀이다.

엄마는 젓갈 가게를 하며 돈을 벌고 아빠는 엄마 가게에 가끔 나오지만 큰 도움이 안 되는 백수이다. 학교에서는 ‘가정환경실태조사서’라는 것을 쓰게 한다. 자신의 부모가 부끄럽다고 느끼는 명은은 거짓말을 한다.

그럴듯한 가족을 새로 만들어낸다.

아빠는 회사원, 엄마는 가정주부라고 하며 선생님과 친구들을 속인다. 이렇게 시작된 거짓말은 계속해서 또다른 거짓말을 낳게 된다. 명은은 반장선거에 나가 반장이 된다. 영화의 배경은 1996년, 20세기 말이다.

여전히 반장의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와 간식을 돌리고 학교에 커튼을 달거나 무언가를 제공하던 시절이다. 명은은 시장에서 젓갈을 파는 엄마가 학교에 오지 못하자, 아픈 할머니를 돌보셔야 해서 학교에 올 수 없다고 선생님에게 말한다. 명은의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셨다.

명은은 반장이 되면 하겠다던 하나의 공약을 지킨다. 비밀 우체통을 만들어 아이들의 소원을 하나씩 실현하게 해주겠다던. 그러나 그 역시도 전부 명은의 주작이다. 마치 여러 아이가 비밀 우체통에 관심을 가지며 소원을 적어낸 것처럼, 자신이 수십 장의 소원을 적은 쪽지를 다른 글씨체로 적어낸다.

명은의 그런 모습은 어린아이지만 다소 지독한 구석이 있다.

스틸 컷= '비밀의 언덕'
스틸 컷= '비밀의 언덕'

이 작품은 한 인간이 가정에서 벗어나 학교라는 사회로 진입하려 할 때 겪을 수 있는 다층적인 감정을 잘 다룬 작품이다. 이는 단순히 어린 아이만의 심리가 아닌 우리 모두의 욕망을 구체적으로 잘 그려놓은 작품이었다.

무언가를 성취하고 싶은 욕구와 사랑받고 싶은 욕구, 그 과정 중에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시기와 질투의 감정들이 그려진다.

이 한가운데 가족이라는 복병이 있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감독은 명은의 가족을 통해 우리에게 ‘가족’의 의미와 실체에 대해 질문한다.

많은 것에 재능을 보이는 명은은 글쓰기 대회에 나가고 상을 받게 된다. 그러다 쌍둥이 자매가 전학을 오게 되면서 명은의 세계는 흔들린다. 그녀들은 솔직하고 꾸밈없는 자신들만의 이야기로 글쓰기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는다.

글을 쓰기 위해 일주일 전부터 도서관에서 온갖 책을 찾고 씨름을 하는 명은과 달리 그녀들은 따로 준비 시간 없이 자신들의 불우한 처지와 결핍에 대해 솔직하고 가감 없이 쓴다. 그 글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게 된다. 사실 그녀들의 가족사는 처참하다. 하지만 그걸 여실히 드러낸다.

“우리는 그냥 우리 얘기를 솔직하게 써. 그럼 선생님들이 상을 주시더라.”

스틸 컷= '비밀의 언덕'
스틸 컷= '비밀의 언덕'

 

쌍둥이 자매의 말을 듣고 명은은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처음으로 숨기고 싶었던 가족의 이야기를 아주 솔직하게 쓴다.

돌아가신 할머니에게 편지로 시작되는 그 글에는 엄마의 억척스러움과 아빠의 무능함,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지만 돌아서면 부모를 비웃는 자기 오빠의 이중적인 모습까지. 그야말로 가족의 실체가 담긴 글이다.

 

명은의 이 글은 지역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글쓰기 대회에서 대상을 받게 된다.

이미 그럴듯한 이야기를 지어낸 원고는 입선하게 되어 명은은 두 개의 상을 받게 된다. 자신이 쓴 대상 작품이 신문에 실리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명은은 담임 선생님께 대상을 포기하겠다고 말한다. 몇 번의 회유에도 명은은 단호하고 선생님이 그 이유를 묻자, 자신이 쓴 글을 가족들이 읽으면 상처받게 될 거라고 말한다.

 

명은은 결국 입선 수상만 하게 되고 가족의 진짜 이야기는 끝내 비밀에 부쳐진다.

명은은 신문사로 찾아가 자신이 쓴 원고를 돌려 달라고 한다. 자신이 쓴 글을 동네 언덕에 올라가 흙을 파 그곳에 묻어버린다. 명은의 이 모습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자기 가족의 실체에 대한 불만이나 부끄러움 같은 것을 비밀에 부치고 싶어 하는 사람의 보편적인 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스틸 컷= '비밀의 언덕'
스틸 컷= '비밀의 언덕'

개인적인 동시에 비밀스럽고 폐쇄적인 공동체가 바로 ‘가족’이다. 영화 중간쯤 명은은 자신의 가족들이 싫어서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삼촌 집에 잠시 가 있다. 할아버지와 삼촌은 겉으로 보기엔 그럴듯해 보였지만 막상 같이 살자 그들만의 또다른 결핍이 드러난다.

이처럼 가족의 겉모습과 그 내부사정은 몹시 다를 수 있다. 특히 가족 구성원은 서로 간의 속살을 거의 다 보고 살기 때문에 긍정적인 점보다는 부정적인 모습을 더 많이 갖기 마련이다. 명은의 모습은 자신이 갖고 싶었던 이상적인 가족과 실제 가족의 모습 사이의 괴리에서 한 번쯤은 힘들어했을 우리 모두의 모습일 수 있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2016년에 나온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그 역시도 초등학생들의 다층적인 감정을 아주 섬세하게 잘 다룬 성장영화이다. 영화 ‘우리들’이 친구들과의 관계를 아주 세밀하게 잘 다루었다면 ‘비밀의 언덕’은 가족을 바라보는 어린 소녀의 내면 심리를 잘 다루었다.

언제부턴가 ‘가정환경실태조사서’는 사라졌다. 한 개인을 여러 배경으로 미리 짐작하고 바라보게 만드는 이 희한한 조사서는 애초에 인간을 계급으로 나누는 자본주의의 폐해 같은 것이었다. 사회는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 그가 가진 배경으로 우선 보려 하고,

그 안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은 언제부턴가 내 가족을 부끄러워하게 되는 시점에 봉착한다. 그걸 감추고 싶어 하는 마음과 동시에 드러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충돌하며 살아가게 된다. 영화는 그 지점에서 일어나는 아이의 성장통을 잘 보여주었다.

스틸 컷= '비밀의 언덕'
스틸 컷= '비밀의 언덕'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6학년이 된 명은은 ‘가정환경실태조사서’에 부모님의 직업을 솔직하게 적는다. 담임 선생님은 적은 조사서를 모두 뒤집으라고 말한다.

“선생님은 너희들의 부모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 그런 건 별로 안 궁금하고 너희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그런 게 더 궁금하다. 그러니, 뒷면에 너희 자신에 대해서 써보자.”

가족!

우리의 시원(始原)이자 울타리가 되어주는 동시에 때론 그들을 부끄러워하는 우리의 양가적 감정이 비밀처럼 드러나는 공동체. 우리 모두는 ‘가족’이라는 비밀의 이름 속에서 탄생했고 여전히 살아간다.

스틸 컷= '비밀의 언덕'
스틸 컷= '비밀의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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