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이름의 무게, 영화 <버드박스>와 교황의 와인 '샤토네프 뒤파프'

사진제공(넷플릭스)= 버드박스
사진제공(넷플릭스)= 버드박스

2022년 7월,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코로나 바이러스가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안전 이별이 가능할 지 겁이 난다. 정확한 발생 원인을 알지 못 한 상태로 지난 3년여를 우리는 정체 모를 바이러스와 동거해왔다.

많은 이들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크고 작은 증상들로 괴로워했다. 사망자 수도 어마어마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 했고, 마스크를 쓴 얼굴에 익숙해진 나머지 ‘마기꾼(마스크 쓴 사기꾼)’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인류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언제나 그랬듯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영화 장르에 ‘아포칼립스 무비’가 있다.

아포칼립스는 신약성경의 마지막 장인 요한 묵시록을 뜻하는 단어로,

대규모 재난이나 인류 멸망을 그린 영화를 아포칼립스 무비라고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한창일 때 OTT서비스를 통해 '수잔 비에르' 감독의 <버드박스>를 보았다. <버드박스>는 전형적인 아포칼립스 무비로, 2014년 발표한 동명의 소설을 각색해 제작되었으며 '산드라 블록'이 두 아이를 위험으로부터 지키려 사투를 벌이는 ‘멜로리 헤이즈’역을 맡았다.

‘그것’을 눈으로 본 사람은 반드시 자살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시각을 통해 감염(?) 되어 신경계 이상을 일으키는 정체 모를 존재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는 두 눈을 가려야만 한다.

얼핏 ‘주제 사마라구’의 ‘눈 먼 자들의 도시’가 떠오르기도 하는데, 영화 <버드박스>에서 중요한 건 이것의 정체가 아니라 과연 누가 살아남았는가, 누가 살아남을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부분이다.

멜러리(산드라 블록)은 정체불명의 재난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그럼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무전기를 통해 계속 생존신호를 보낸다. 그녀 곁에는 그녀 자신 말고도 지켜야만 할 어린 두 아이가 있다.

마침내 무전기에서 ‘새’의 소리를 따라오라는 회신을 받은 멜러리, 그러나 ‘그것’으로부터 안전한 그 장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눈을 가린 채 강을 건너야 하며, 급류 지점에서 누군가의 희생(시각)이 필요하다는 말도 듣게 된다.

 

작은 보트에 오른 세 사람, 멜러리와 자신의 혈육인 소년(boy), 혈육은 아니지만 폐허가 된 지구에서 boy와 함께 길러온 소녀(girl) 중 누군가는 희생을 해야만 셋 중 둘이라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멜러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영화 <버드박스>에서 눈을 가리지 않고도 자살증후군에 감염 당하지 않은 이는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자와 처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마음의 눈이 혼탁해진 사람은 생존을 위해 눈을 가린 사람들의 눈가리개를 벗겨 참혹한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약한 것과 악한 것은 때로 통하는 법이라, 불행과 더러움을 나와 무관한 이들에게까지 물들게 해 인간 본연의 죄책감을 희석시키려는 존재는 늘 있어왔다. 영화는 결국 ‘함께’ 보지 않는 쪽을 선택한 사람들, 즉 희생을 나누려는 사람들만이 살아남아 결국 답을 찾아낼 거라는 희망을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주제 사마라구’의 소설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 유일하게 이름을 가진 존재는 눈물을 핥아주는 개 ‘콘스탄체’였다. 그리고 영화 <버드박스>에서는, 그저 boy와 ‘girl’로 불리던 아이들이 올바른 목소리를 좇아 ‘함께’ 희망의 땅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자신을 지칭하는 이름을 부여 받는다.

이름은 중요하다. 나를 나타내는 가장 정확한 상징이기 때문이다. 이름값하며 살라는 말은 그러므로, 나보다 타인이 더 많이 부르는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살라는, 인간성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뜻에 다름 아니다.

팬데믹 시대에 우리는 저마다의 배려와 희생에 기대어 삶을 지탱해 왔다. 손을 더 자주 씻는 일, 반드시 마스크를 쓰는 일, 대규모 모임을 자제하고 거리를 두는 일 등이 그러하다.

팬데믹 기간 동안, 마스크 착용 권고에 분노를 하거나 방역지침에 아랑곳없이 집회를 열었던 이들을 보며 영화 속에서 사람들의 눈가리개를 우악스럽게 벗겨내던 광인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팬데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스크는 여전히 영화 <버드박스> 속 눈가리개만큼 중요한 생존 도구다.

사진= 교황의 와인 ‘샤토네프 뒤파프’
사진= 교황의 와인 ‘샤토네프 뒤파프’

가톨릭에서는 세례를 받을 때, 따로 ‘세레명’을 받는다. 그 이름을 통해 교회 안에서 형제 자매로 거듭 나는 것이다. 천사나 성인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받은 신자는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려 노력한다. 이름이란 그토록 중요하다.

세례를 받을 때 예수의 피를 의미하는 레드 와인을 받아 마시는데, 반드시 어떤 와인이어야 한다는 규칙은 없지만, 세례 와인이라고 하면 나도 모르게 ‘샤토네프 뒤파프’를 떠올리고는 한다.

샤토네프 뒤파프는 프랑스 남부 론 지역 와인으로 ‘교황의 와인’이라고도 부른다. 14세기, 7대에 걸쳐 로마 교황청을 남 프랑스 론으로 이전한 아비뇽 유수로 인해 이 지역 레드 와인이 양과 질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그르나슈라는 품종을 중심으로 쉬라, 무드베르드, 생쏘 등 허가 받은 13가지 포도가 블렌딩 된 양질의 와인이 생산되는 곳이기도 하다.

병에는 대개 교황의 문장이나 성 베드로의 두 열쇠가 새겨져 있으며 타고난 떼루아에 오랜 역사가 더해져 알코올 도수가 다소 높으면서 복잡한 풍미를 지닌 와인이 되었다. 특히 샤토네프 뒤파프는 70~100년 이상인 오래된 포도나무의 포도를 사용하며 여전히 친환경 재배를 고집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7월은 나의 세례명인 레비나 성녀의 축일이자 내 생일이 있는 달이다. 그 날은 조용히 미사를 드리며 내가 받은 이름의 무게와 의미를 묵상하고 잘 익은 샤토네프 뒤파프 와인을 한 잔 따라 자축을 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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