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푸른 달빛 한 스푼

사진출처(네이버)= 문라이트
사진출처(네이버)= 문라이트

얼마 전 신인 감독의 작품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굉장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샬롯 웰스 감독의 <애프터썬> 이야기다. 이 영화는 2022년 칸 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되어 처음 공개된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자,

이동진 평론가를 비롯한 유수의 영화평론가들이 5점 만점을 주며 한동안 회자가 된 작품이다. 내게도 여운이 매우 길었던 작품으로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나서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서기 힘들 정도였다.

이런 보석 같은 감독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것일까? 알고 보니 <문라이트>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베리 젠킨스 감독이 샬롯 웰스 감독의 단편 3개를 보고 그녀의 탁월한 감각에 반해 그녀에게 장편 연출을 제안했고, 영화 <애프터썬>은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었다.

과연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남 다르다는 건 <문라이트>를 보면서 익히 알고 있던 터라 영화 <애프터썬>에서 베리 젠킨스 감독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괜시리 더 반가웠다.

베리 젠킨스 감독의 <문라이트>는 아주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2017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한다. 작품상 수상을 <라라랜드>라 발표한 것. 왜냐하면 그 해의 작품상은 베리 젠킨스의 <문라이트>였기 때문이다.

그 사건이 <문라이트>라는 영화에 약이 되었는지 독이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꼭 그런 사건이 아니더라도 <문라이트>는 주류사회라는 망망대해를 향해 힘껏 던진, 작지만 단단한 조약돌 같은 영화다.

<문라이트>가 달빛 아래 바다로 던진 조약돌은 파문을 일으켰고 그 파문은 내 마음 속까지 푸른 물결로 일렁이게 했다. <문라이트>를 보는 동안 눈길을 사로잡은 장면은 사람의 뒷모습이었다.

누군가가 내 앞에서 등을 돌리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누군가의 뒷모습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일은 흔하지 않다. 그리고 그런 뒷모습은 대개 특별하고도 쓸쓸하게 회자 되고는 한다.

 

살다 보면 세상에 내 편이 단 한 명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사람들이 ‘함께’ 라는 단어의 정의를 쉽게 말하며 살아갈 때 내게는 그 단어의 뜻을 제대로 알 자격이 주어지지 않은 것만 같은 그런. 그때 어떤 이가 등 뒤에서 다정하고도 확실하게 내 이름을 불러준다면 한 줄기 달빛처럼 내게 구원의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사진출처(네이버)= 문라이트
사진출처(네이버)= 문라이트

시인도 노래하지 않았나. 네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는 비로소 꽃이 되었다고. 인간은 어쩌면 내 정체성을 타인의 인정으로부터 발견하고 싶어 하는 유일한 존재다.

집 열쇠가 있지만 그 열쇠로 제 집의 문을 여는 일, 그 집에서 제 몸 하나 누이는 일조차 마음껏 할 수 없는 소년 샤일로가 사는 도시를 자유의 도시(Libertycity)라 부르는 모순이 인간 사회에선 빈번한 일임을 미리 소년에게 가르쳐주어야 했을까?

사는 일이 어려운 시험 같기만 한 소년의 뒷모습엔, 불균형하게 기울어진 어깨 아래로 마른 팔이 늘어져 있고 그 위로는 일상의 먼지가 일으킨 스산함이 자욱하게 내려앉아 있다.

그저 작은 녀석(little)이라 불리던 소년은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이와 두 번, 바다에서 기억할만한 순간을 공유한다. 고단한 상처로 가득한 소년의 일상을 적셔준 시간, 부조리와 악의로 가득한 세계에 강림한 달빛은 그 순간 소년에게도 공평하게 따스하다. 그는 비로소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모진 삶은 그를 그 이름으로 살아가게 두지 않았고, 그는 드물게 찾아온 달빛의 시간을 억지로 봉인해 둔 채 다른 모습, 다른 인격으로 살아간다.

유년의 트라우마와 악몽으로 괴로움이 엄습해 올 땐 얼음이 가득한 통에 얼굴을 쑤셔 넣거나 푸쉬 업을 혈관이 죄다 튀어나올 정도로 한다. 고통을 더 큰 고통으로 감추는 건 고통을 극복하는 가장 서글픈 방식이다.

세월이 흐르고, 소년의 이름을 불러준 사람, 노래 하나로 자신을 떠올려준 그 사람과 재회한다. 어른이 된 둘 사이에 와인과 함께 멋쩍은 이야기들이 오간다. 나를 알아봐 준 유일한 존재, 나를 아프게 했지만 나의 처음이었던 사람.

첫사랑이란 단어 속에 담긴 온갖 감정들 중 무엇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말줄임표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 간신히 쏟아낸 한 마디 말 뒤로 바다 소리가 들려오고 이름을 되찾은 샤일로는 케빈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댄다.

그 후의 시간이 그들을 맨 처음 손을 잡고 어루만졌던 그 시절로 되돌려 주진 못 하리라. 내일도 오늘과 다름없이 가난하거나, 단속을 피하며 마약을 파는 위험한 일상이 이어질 테지만 우리는 이제 안다.

추억은 앞으로의 삶을 지탱해주는 연료가 되고, 사랑은 나로 하여금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게 만드는 엔진오일이라는 것을.

달빛 아래선 블랙도 블루로 보인다. 내게만 유난히 혹독해 보이는 삶 속에도 한줄기 빛이, 한 떨기 꽃이, 마법처럼 깃드는 순간이 있다. 악의를 믿는 것보다는 사랑이 세상에 존재함을 믿는 편이 나를 더 윤택하게 하지 않던가.

이미지= 칵테일 ‘블루문’
이미지= 칵테일 ‘블루문’

이제 등 뒤에서 내 이름을 불러주는 이에게 고개를 돌릴 시간이다. 아니,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줄 시간이다. 달빛 쏟아지는 밤의 길이는 그리 길지 않으므로.

달의 색과 무관하게 한 달에 달이 두 번 뜨는 현상에 있어 두 번째 뜨는 보름달을 블루문이라 한다. 그만큼 드문 현상이라는 뜻이다. 이와 똑같은 이름의 칵테일도 있다. 진 베이스에 블루 큐라소나 크렘 드 바이올렛과 레몬주스를 섞어 만드는 블루문은 이름처럼 신비스러운 푸른빛이 감돈다.

믿거나 말거나기는 하지만 바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여성에게 작업을 걸다 그 여성이 칵테일 블루문을 주문하면 물러서야 한다는 의미라 한다. 너는 내 이름을 부를 자격이 없다는 뜻일까? 하긴 블루문이란 현상 자체가 매우 드문 것, 혹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의미하니 어쩐지 납득이 가는 듯도 하고.

블루문은 빛깔과 청량한 맛 과 향 때문인지 바닷가에 가면 유난히 떠오르는 칵테일이다. 다만, 그 바닷가에서 멋진 남자가 내 이름을 물어온다면 칵테일 블루문은 잠시 넣어두도록 하자.

포스터출처(네이버)= 문라이트
포스터출처(네이버)= 문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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