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그해, 우리는
사진= 그해, 우리는

드라마, 그것도 완결이 아직 되지 않은 드라마는 ‘정주행’, 즉 실시간으로 챙겨보지 않는다. 뭔가에 내내 ‘묶여’있는 듯한 느낌이 싫고, 다음 화가 궁금해 안절부절 하는 것도 별로인데다가,

매주 열심히 챙겨보던 드라마 결말이 허술하면 그간 쏟아 부은 내 시간과 애씀이 배반당하는 기분이 들어서. 그래서인지 아주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면 내용을 ‘스포일러' 당해도 그다지 분노하지 않는다.

영화 쪽을 더 선호하고 OTT 서비스 등을 통해 이미 검증된(?) 드라마만 주로 챙겨보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 내가 최근 실시간으로 챙겨본 드라마가 있다. 본방사수를 하고도 무려 재방송으로 또 보고, 관련 영상을 유튜브로 손수 챙겨보기까지 했다. 드라마 <그 해, 우리는> 이야기다.

주인공 ‘국연수’와 ‘최웅’은 각각 전교 1등과 전교 꼴찌를 도맡아 하는 같은 고등학교 학생이다. 우연한 계기로 방송국에서 둘의 일상을 촬영해 방송에 내보내게 되는데, 그러던 중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둘은 사귀게 된다.

그러나 연수와 웅이의 연애는 저마다 상처를 안고서 끝이 난다. 그 후 10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직장인이 된 연수와 유명한 화가가 된 웅이가 10년 전 찍었던 다큐의 속편 촬영을 계기로 다시 만나게 되면서 펼쳐지는 에피소드가 드라마 <그 해, 우리는>의 기본 줄거리다.

언뜻 줄거리만 보면 그리 특별할 것 없어 뵈는 이 드라마의 무엇이 이토록 내 마음을 내내 붙들었을까? 적재적소에서 감성을 효과적으로 건드려주는 대사와 배우들의 생활감 묻어있는 자연스러운 연기도 ‘호감 포인트’지만,

드라마 <그 해, 우리는>의 세계에 ‘진짜 악인’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뉴스에선 하루가 멀다고 흉악한 범죄 소식이 올라오고, 대선을 코앞에 둔 정치판은 혼탁하며, 자극적인 막장 이야기가 대세인 요즘 시절에 이런 드라마는 말 그대로 ‘단비’와 같았다.

사실 주변을 돌아보면 사람들은 대개 착한 마음을 먹었다가 가끔은 사소한 악의를 품기도 하며 살아간다. 특별함을 꿈꾸지만 대체적으로 평범하고 드물긴 하지만 놀랍도록 환상적인 경험을 하거나 미치도록 환장할 일을 겪기도 하면서 말이다. 이 드라마의 미덕은 픽션 특유의 ‘내게 저런 일이 일어날 리 없어!’의 정서가 아닌, ‘나도 언젠가 저랬던 적이 있었는데… ‘ 라는 여운을 남긴다는 점이다.

스틸 컷= 그 해, 우리는
스틸 컷= 그 해, 우리는

사랑도 해보고, 이별도 해보고, 힘들 땐 주변인의 도움을 받기도 또 주기도 하며, 세상천지 내가 가장 불우한 사람인 것 같다가도 뜻밖의 행운 앞에서 벅찬 눈물을 흘려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 저거 내 이야기!’의 순간을 이 드라마를 통해 소환 가능하다.

물론 디테일까지 같지는 않지만 그때의 감정이나 감각이라는 측면에서 은은하게 결이 ‘통’하는 순간들이 자주 등장했다.

매일을 짜릿함 속에서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잔잔한 물결 같은 삶을 바라지만 종종 햇살에 반짝이는 윤슬의 황홀함을 기억하며 그 순간과 다시 조우하게 되길 기대하며 산다. 삶이라는 바다의 수면이 항상 반짝이는 것이 좋을까? 마냥 눈이 부실 뿐이다. 제대로 눈을 뜰 수조차 없는 그런 일상은 쉽게 피로해진다.

창고에서 찾아낸 빛바랜 오르골 상자를 열자 흘러나온 추억의 멜로디, 살짝 열린 창틈으로 쏟아진 귤색 햇살의 띠 안에 느리게 소용돌이 치고 있는 먼지 입자들, 지붕 아래 매달린 자그마한 물고기 모양 풍경을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건드려 자아낸 맑은 음향,

서쪽 비구름이 소환한 습기 먹은 계절의 냄새, 가로등 불빛 아래 드리워진 내 그림자가 유난히 길어 보여 쓸쓸해진 밤, 불현듯 네가 나타나 나를 뒤에서 가만히 앉아주었으면 하는 바램, 그 품 안에서 건네받은 반드시 행복해질 거라는 예감, 이런 것들이 일상의 수면 위로 떠오를 때 반짝이는 윤슬이 된다.

사랑의 역량은 사람을 통과해 내게로 채워지는 것임을, 그것이 마중물이 되어 더 샘솟는 거라는 당연한 명제를 꽤 오래 잊고 살아온 듯하다. 희박한 내 사랑의 역량이 드라마 하나로 갑자기 채워질 리야 없지만 가능하다면 사랑에 냉소적인 사람이고 싶지는 않아졌으니.

드라마 <그 해, 우리는>에서는 초여름이 배경인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하기야 청춘은 분명 그 계절을 닮았다. 아직 절정의 뜨거움까지 도달하진 못 했지만 봄의 여린 연두가 초록으로 짙어지고,

한 번씩 쏟아지는 소나기는 종종 사랑의 전령이 되어주기도 해 우산이 없어도 곤란한 마음이 들지 않는. 비 온 뒤 땅에 고인 물웅덩이에는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반영으로 담겨 평행우주로 가는 게이트처럼 느껴지는 그런.

투명한 초록빛 액체가 글라스에 담겨 나오는 ‘미도리 샤워’라는 칵테일이 있다. 사실 이 칵테일의 진짜 이름은 미도리 ‘사워(sour)’이다.

사진= 칵테일 '미도리 샤워'
사진= 칵테일 '미도리 샤워'

그런데 묘하게도 우리나라에선 미도리 ‘샤워(shower)’로 불린다. 멜론 맛이 나는 ‘미도리’라는 리큐르에 스윗&사워 믹스의 레몬 향이 어우러진 칵테일로 취향에 따라 탄산음료를 첨가하기도 한다.

상쾌한 빛깔과 상큼한 향, 게다가 달콤한 맛까지, 특히 여성들이 선호하는 칵테일이기도 한데, 얼음으로 온도가 낮아진 글라스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조명을 받으면 아주 어여쁘게 빛이 난다.

마치 초여름에 시작된 첫사랑의 감수성을 그린 드라마 <그 해, 우리는>같은 칵테일이라고 할까. 그래서 미도리 사워 보다는 미도리 샤워 쪽이 더 그럴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같다.

마음이 건조하다 못 해 각질이 까끌하게 일어났다면 칵테일 미도리 샤워와 드라마 <그 해, 우리는>을 처방하고 싶다. 마음에 일어난 각질은 나를 가렵고 아프게 하지만 타인에게도 의도치 않은 상처를 낼 수도 있으니.

포스터= 그 해, 우리는
포스터= 그 해,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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