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 도시에서 마시는 따뜻한 청주의 맛과 영화 <러브레터>

스틸 컷= 러브레터
스틸 컷= 러브레터

일본어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오겡끼데스까’라는 말은 들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1995년 영화 <러브레터>에 등장한 이후 유명해진 이 문장은 숱하게 회자되고 패러디가 되어왔으니.

94년에 대학에 입학한 나는 사실 이 영화를 소위 어둠의 경로를 통해 처음 보았다. 당시 한국에서 일본영화는 상영금지였기 때문이다. 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해보고 싶은 것이 사람 심리가 아니었던가.

그 무렵 대학가 골목에 위치한 영화카페라는 곳에 가면 어두컴컴한 실내에 걸린 조악한 스크린을 통해 일본 영화를 보는 일이 가능했다. 자막이 아예 없을 때도 있었고, 사실 자막이 있어도 자체적으로 해결한 번역이다 보니 엉망인 경우가 많아 큰 의미가 없기도 했다.

그러다 1998년 일본 문화가 개방되면서 ‘기타노 타케시’ 감독의 영화 <하나비> 다음으로 상영된 영화가 <러브레터> 였는데, 그 후로도 잊을 만하면 재개봉을 거듭했던 영화 <러브레터>는 매번 많은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에서 가장 사랑 받는 일본 영화로 자리 잡았다. 대체 이 영화의 매력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오래 영화 매니아들의 마음에 머무르는 영화가 된 걸까?

겨울 도시 일본 북해도의 오타루가 배경인 <러브레터>는 영화 초반부 설원을 담은 롱테이크 장면이 무척 아름답다. 영화에서는 히로코의 연인이었던 이츠키가 절벽에서 추락해 사망하는데, 이츠키의 죽음이 안겨준 아픔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 하던 히로코는 어느 날, 이츠키의 졸업앨범에 실려있는 이츠키의 옛 주소로 편지를 보낸다.

하지만 그 주소는 죽은 이츠키(男)의 옛 주소가 아닌, 그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동명이인 이츠키(女)의 주소였다. 히로코의 편지를 받은 현재의 이츠키(女)가 답장을 보내오자 동명이인의 존재를 몰랐던 히로코는 동요하게 되고, 마침내 이츠키를 찾아 오타루로 향하게 된다.

히로코는 과연 이츠키를 만나게 될까? 죽은 자신의 연인인 이츠키와 오타루에 사는 현재의 이츠키에게는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자기와 이름이 같은 동창생 이츠키가 죽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 이츠키는 우연인지 충격인지 감기가 악화되어 심한 고열과 함께 쓰러져 위험한 지경에까지 이른다.

그 즈음 히로코는 이츠키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이츠키가 죽었던 장소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죽은 이츠키의 중대하고도 슬픈 비밀을 알게 된 히로코는 과거에만 머물러있던 자신을 바꿀 결심과 함께 산장 밖 설원에서 예의 그 유명한 대사를 죽은 이츠키를 향한 마지막 인사로 남기고 돌아온다. 한편 그 대사는 현재의 이츠키에게도 유효한 인사였을 수도 있다.

 

“오겡끼데스까? 와따시와 겡끼데스!”

 

(잘 지내죠? 나는 잘 지내요!)

기억은, 살아남은 이들만 가진 능력이다. 산 자는 죽은 이를 기억할 수 있어도 죽은 이는 기억도 끝이 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여행을 통해 현재의 나를 발견하는 건 오직 살아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미래의 과거가 될 지금이라는 시간의 진정한 가치를 느끼고 저장할 수 있는 건 내게 지금 생명이 있어서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설원은 고요하며, 오로지 나의 목소리만이 메아리 되어 맴돈다.

대학 졸업 후 일본에서 6년쯤 살았던 적이 있다. 그 시절 일본의 많은 곳을 여행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도시는 한 겨울에 떠났던 북해도였다. 열차에서 내려 바깥으로 나오니 무릎까지 푹푹 빠질 정도로 눈이 쌓여 있었고, 펑펑 내리는 눈을 피하려 들어간 식당은 게 요리 전문점이었다.

주문한 게 요리가 나오기 전 당시 함께 동행 했던 남자친구와 데운 청주를 주문해 작은 잔에 따라 홀짝이는 동안 그는 북해도의 겨울에 차가워진 내 발을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게다가 바깥의 차가운 공기와 공복에 시달린 위장에 따뜻하고 달큰한 술이 들어가니 나는 그만 요리가 나오기도 전에 테이블에 엎드려 잠이 들고 말았다.

이미지= 청주
이미지= 청주

그날 마신 청주보다 더 비싼 청주를 마셔본 일은 있어도 그날 마신 청주보다 맛있는 청주는 없었다. 그 후 많은 세월이 흐른 탓에 가게 상호나 위치, 청주의 이름 같은 건 죄다 잊고 말았지만 잔의 온기와, 게 요리에서 풍겨온 뜨거운 김의 모양, 그의 다정했던 손길, 나이가 지긋했던 식당 아주머니의 친근한 웃음만큼은 시간이 흐를수록 선명하다.

연일 습하고 더운 여름날이 이어지니 불현듯 북해도 여행의 기억이, 그날 함께했던 옛 연인의 추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지금은 비록 그가 어디에 사는지, 어떻게 사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오늘만큼은 나도 히로코처럼 외치고 싶다.

 

오겡끼데스까? 와따시와 겡끼데스!

 

포스터= 러브레터
포스터= 러브레터

 

관련기사

저작권자 © 무비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