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면의 밤,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와 피트 위스키

사진출처(네이버)= 녹터널 애니멀스
사진출처(네이버)= 녹터널 애니멀스

세상의 모든 여자는 아름답다고 한 디자이너 ‘톰 포드’는 영화감독으로서의 감각 또한 그의 디자인만큼이나 훌륭하다. 2016년 개봉한 <녹터널 애니멀스>가 바로 디자이너가 아닌 영화감독 톰 포드의 작품으로, 같은 해 베니스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며 이를 입증한다.

게다가 오스틴 라이트의 장편 소설 <토니와 수잔>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에서 주인공 '수잔 머로우(에이미 애덤스)'의 직업을 영문학 교수에서 미술관 관장으로 설정해 감독 톰 포드는 크리에이티브한 감각 또한 영화 속에서 마음껏 펼친다.

영화감독 톰 포드는 영화를 찍을 때 스스로 정해둔 엄격한 룰이 한 가지 있는데, 본인 브랜드의 제품을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스타일, 심지어 수잔이 입은 무심한 니트조차도 지극히 '톰 포드' 스러웠으며 특히, 영화 후반부에 등장한 수잔의 애플그린 컬러의 드레스는 훔쳐서라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물론 가져온다 한들 입을 수 있느냐, 하는 건 별개의 문제겠지만.

수잔은 어느 날, 소설가가 꿈이었던 헤어진 연인 '에드워드 쉐필드(제이크 질렌할)'로부터 ‘녹터널 애니멀스’라는 제목의 소설을 받는다. 소설 속 이야기는 슬프고 잔혹했으며 주인공의 모델이 된 인물이 수잔 자신임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수잔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면서 혼란과 충격에 휩싸인다. 열렬하게 사랑했던 연인들의 사랑과 이별에서 과연 가해자는 누구이고, 피해자는 누구일까?

피해자는 가해자가 자신에게 가한 모든 언행을 디테일 하게, 때론 더 혹독하게 기억한다. 가해자는 그러나, 가해의 기억이 어렴풋하거나 종종 ‘없었던 일’ 취급을 하기도 한다.

이제는 오래 전 일이 되었지만 이혼 소송을 하는 과정에서 헤어진 남편과 나는 서로가 서로에게 가해자임과 동시에 피해자였고, 우리는 저마다 내가 ‘당’한 피해의 목록과 세부 상황에 대해 상대에게 거듭해 상기할 것을 요구했다.

기억의 되새김질 속에서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 편집을 했을 테고, 용서는커녕 이를 갈며 속으로 복수를 다짐했다. 그 과정에서 드러난 우리의 삶은 불발된 콘돔처럼 찜찜하고 추했다. 어느덧 제발 복수를 꿈꾸지 않게 해달라고 나는 신에게 빌었다.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

그래서였을까?

이혼 후 우리는 아무도 서로에게 복수하지 않았(못했)고 그럭저럭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오랜 세월 한 가지에만 몰두할 수 있는 인간의 숭고함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떠올려 본다.

인간의 숭고함이 늘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에만 깃들지는 않는다. 그런 이유로 달콤한 사랑이라는 말은 가능해도 달콤한 복수라는 말은 불가해한 표현임에 틀림이 없다.

요즘엔 헤어질 때 곱게만 보내주어도 좋은 사람이라고들 한다. 영화 <라라랜드>가, 노스탤지어여 영원 하라! 며 심장을 적시는 뜨거운 눈물을 선사한 이유도 바로 그 지점이 아니겠나, 아름다운 이별 말이다.

수잔으로 하여금 그토록 불면의 밤을 헤매게 한 사연은 대체 무엇일까? 에드워드는 어째서 그런 무서운 소설을 수잔에게 보낸 걸까? 그건 미련일까, 복수일까?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히치콕이 연출한 듯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는 차갑고 딱딱한 대리석 바닥 위를 맨발로 걷고 있는 듯 낯설고 이질적인 느낌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묘한 지점에서 마음이 세차게 흔들렸다.

마치 완벽하게 청결한 집에서 절대 있어서는 안 될 머리카락 한 올을 발견한 것처럼. 그리고 그 머리카락이 타인이 아닌 내 것임을 인지하고 소스라치게 놀란 것처럼.

영화는 액자식 구성으로 연출도 독특했지만, 미술관 관장인 수잔의 세련되고 우아한 자태를 보는 즐거움과 함께 그녀의 자택과 갤러리에 자리한 근사한 현대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보는 내내 과연 톰 포드가 톰 포드 했구나 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으니까.

신기한 건 전혀 다른 영화임에도 <녹터널 애니멀스> 관람 내내 <라라랜드>가 떠올랐다는 것. 두 작품 모두 영화 초반 5분을 견딜 자신이 없다면 영화관에서 당장 나가주지 않을래? 라며 관객을 도발한다고 생각했다.

해피엔딩의 로맨스 영화가 아님에도 남녀 주인공의 케미스트리가 남다른 것 또한 두 작품의 유사한 지점. 작정하고 그런 것은 아니었으나 나는 이 영화를 잠이 오지 않는 깊은 밤 심야 상영관을 찾아보러 갔다.

영화관엔 나를 포함해 두어명의 관객이 전부였다.

불면의 밤에 본 불면에 관한 작품이어서인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영화의 장면이 잔상으로 남았다. 불면증을 겪어본 사람들에겐 알코올에 의존해보려는 시기가 있는데, 술의 힘으로 잠들고 싶은 마음이 자칫 알코올 중독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지독한 중독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나도 그 직전 단계까지 갔던 경험이 있다. 그 시절 이런저런 종류의 술에 손을 댔는데, 그때 만난 술 중 지금까지도 애정 하는 것이 피트 향이 나는 고도수의 싱글몰트 위스키로 얼음도 물도 섞지 않고 니트로 마시는 것을 가장 선호한다.

이미지= 피트 위스키
이미지= 피트 위스키

싱글몰트 위스키는 맥아(보리)를 원료로 해 단일 증류소에서 만든 위스키를 뜻하며, 위스키가 만들어지는 지역과 증류소에 따라 독특한 맛과 향을 지니고 있다. 특히, 아일라 섬의 싱글몰트 위스키의 경우 특유의 강한 피트(이탄, 타소 함유량 60% 미만의 석탄)향 때문에 호 불호가 크게 갈린다.

위스키 제조 과정에서 피트로 훈연을 해 술에서 흙, 그을음, 타르, 나프탈렌 등의 독특한 향이 입혀지는데 이걸 위스키 애호가들은 병원 냄새, 소독약 냄새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게다가 섬 특유의 해풍은 위스키의 미네랄리티를 높여 아일라의 싱글몰트 위스키는 그 어떤 위스키보다 개성이 강한 술이 되었다.

나도 처음엔 그 강렬한 향 때문에 미간을 찡그렸지만 독특한 풍미 뒤에 밀려오는 풍부한 아로마와 따뜻한 여운 덕분에 피트 위스키의 매력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오죽하면 피트 위스키 대표 브랜드 ‘라프로익’에는 이런 문구가 써있을 정도. LOVE or HATE.

불면에 시달리는 녹터널 애니멀(야행성 동물)에게 어울릴만한 술을 추천하라면 나는 아일라 섬에서 만든 피트 위스키 한 잔을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 사랑에 빠지게 될지 혐오하게 될지 알 수는 없지만, 사랑에 빠진 순간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할 진한 위로를 경험하게 될 테니까.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 피트 위스키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 피트 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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