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의 연습, 이별의 복기, 영화 ‘화양연화’ 그리고 위스키 하이볼

사진= 장만옥과 위스키 하이볼
사진= 장만옥과 위스키 하이볼

어둑해진 저녁 갑작스레 비가 쏟아지고 남녀는 공교롭게 얕은 처마 아래 나란히 서있다. 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가로등 불빛은 창백하다. 아는 사인지 모르는 사인지 둘 사이에 감도는 분위기는 묘하다.

왕가위 감독의 2000년 개봉작인 영화 <화양연화> 속에서 치파오를 입고 저녁 식사용 국수를 사러 가는 첸(장만옥)의 뒷모습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다.

한 손에 든 철제의 오래된 도시락 통이 그 어떤 값비싼 명품 기방보다 근사해 보일 정도였으니까. 그녀의 뒷모습 아래로 흐르는 음악은 또 어떻고. 늘 혼자서 국수를 사러 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꼿꼿하지만 쓸쓸하기 짝이 없다.

 

국수집에서 가끔 마주치는 첸과 차우(양조위)는 한 아파트에 사는 이웃이다.

 

스틸 컷= 화양연화
스틸 컷= 화양연화

그리고 그들의 배우자는 서로 불륜 관계에 있다. 첸의 남편과 차우의 부인은 출장을 핑계 삼아 자주 함께 외국에 간다.

첸의 남편은 똑같은 가방을 사서 하나는 부인 첸에게 또 하나는 불륜 상대인 차우의 남편에게 선물하고, 차우의 부인은 똑같은 넥타이를 두 개 사서 하나는 남편 차우에게 다른 하나는 불륜 상대인 첸의 남편에게 선물한다.

 

같은 아파트, 같은 가방, 같은 넥타이,

이런 아슬아슬한 공유 상황을 그들은 즐기고 있는 걸까?

 

내연남과 남편에게 또 내연녀와 부인에게 똑같은 물건을 안기는 심리를 나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지만, 서로의 배우자가 깊은 관계임을 알고 난 후 연극을 하듯 애인 관계를 맺은 첸과 차우는 어느덧 진짜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배우자와 애인에게 똑 같은 선물을 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 차이를 사랑과 ‘욕망의 차이’라 말하고 싶다.

 

사진= ‘화양연화’ 장면 중  “실은요, 남편한테 같은 넥타이가 있어요.” “아내한테도 같은 가방이 있어요.”
사진= ‘화양연화’ 장면 중  “실은요, 남편한테 같은 넥타이가 있어요.” “아내한테도 같은 가방이 있어요.”

사랑에 빠진 스스로에게 도취할지언정 끝내 그 사랑을 내 곁에 꽁꽁 묶어두지 않겠다는 의지는 우리의 사랑이 내내 아름답게 기억(록) 되길 바라는 저마다의 미학회로 때문인지 모른다.

 

가슴 저미게 아름다운 우리의 시간을 훼손하고 싶지 않은 소망 말이다.

 

사랑(람)에 빠지는 일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발생한 ‘사고’라면 사랑(관계)에 지속하는 일은 이 감정이 진짜라 믿는‘사건’이다. 영화 속에도 그런 말이 등장한다.

많은 일들은 나도 모르게 시작된다고, 사랑의 행로에서 한동안은 서로에게 품은 믿음의 온도가 같음에 안도하나 상대의 믿음의 방향과 속도가 나와 같지 않음을 감지하는 순간 당황한다.

알아차리고만 너의 배반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 눈치 챈 나는 피해자고 그걸 들킨 너는 가해자일까? 이윽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된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종결할 것인지 내내 고민해야만 한다.

모든 관계의 실체가 드러나고, 홀로 싱가포르로 떠나게 된 차우는 심중에 묻어둔 질문을 끝까지 첸에게 하지 못(안)한다. 첸 역시 혀끝에서 맴도는 질문을 고요히 삼킨다.

사진= ‘화양연화’ 장면 중 “많은 일이 나도 모르게 시작되죠.”
사진= ‘화양연화’ 장면 중 “많은 일이 나도 모르게 시작되죠.”

 

“배표가 한 장 더 있다면 나와 함께 갈래요?”

“배표가 한 장 더 있다면 나를 데리고 가줄래요?”

 

그러나 그 표는 아마도 실재하지 않는다. 그저 이별의 감흥을 내내 장식해줄 슬프도록 아름다운 ‘if I should’라 쓰인 리본일 뿐. 비밀과 거짓말은 거대한 나무 아래 이어진 뿌리처럼 운명 공동체, 차우는 훗날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사원 돌 틈에 비밀을 묻는다.

그곳에서 비밀은 싹을 틔우고 거대한 나무줄기가 되어 언젠가는, 첸과 차우가 더 이상 지구에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앙코르와트의 벽을 온통 뒤덮을 테다. 이는 영원한 사랑의 증거일까, 관능의 망념에 고통 받을 거라는 예언일까?

사진= ‘화양연화’ 장면 중 “바보같이 왜 그래요, 진짜도 아닌데. 울지 말아요”
사진= ‘화양연화’ 장면 중 “바보같이 왜 그래요, 진짜도 아닌데. 울지 말아요”

글쎄, 그건 사랑에 빠진 당사자들만이 알 수 있는, 혹은 도달하게 되는, 어떤 경지겠지만, 지구인으로 태어난 이상 그런 사랑을 나라면 사양하고 싶다. 그저 신상 핸드백이나 패턴이 멋진 넥타이를 선물하는 정도의 연애로 족하다.

앙코르와트를 덮는 거대한 나무의 가지와 뿌리보다는 한 때일지라도 초록으로 빛나다 어느 계절에 이르면 당연하고 자연스레 땅으로 져 흙으로 묻히는 정도로 충분하다. 연애는 나의 미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찬란하고 즐거워야 하니까.

영화 속 첸 여사의 치파오 차림을 보며 길쭉하고 날씬한 글라스에 담긴 하이볼이 떠올랐다. 독한 위스키가 차갑고 투명한 얼음과 기포로 가득한 탄산수, 그리고 레몬을 만나면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이미지= 위스키 ‘하이볼’
이미지= 위스키 ‘하이볼’

하이볼의 냉기는 아련하고, 맛은 짜릿하며, 얼음이 글라스에 부딪히는 음향마저 청량하다. 마시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위스키의 여운은 여름날 밤 나를 통과한 지난 사랑의 순간을 닮았다.

우리는 이생에서 다시 만나지 못 할 사람들이지만 그 시간은 지극히 아름다웠다(고 기억한다). 위스키의 여운은 곧 사라지고, 얼음은 녹는다는 본성을 타고난 존재며, 여름은 가을이 오기 전 끝이 나기 마련이다.

 

지난 사랑처럼,

그것이 진짜든 가짜든.

 

포스터= 화양연화
포스터= 화양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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