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은 돌아오는 걸까? 영화 <아사코>와 가고시마 의 '고구마 소주'

스틸 컷= 아사코
스틸 컷= 아사코

어째서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지는 모를 수 있다. 아니 대개는 그 이유를 모른다. 다만 사랑에 빠지게 된 순간의 느낌만큼은 세월이 지나도 생생하다. 누군가는 깊이가 묘연한 호수에 풍덩 빠지는 것 같았다고,

주변의 공기나 중력이 달라지는 느낌이라고도 한다. 지축이 흔들리는 것 같다거나 귀에서 종소리가 울렸다고도 한다. 무엇이 되었던 사랑에 빠진다는 건 ‘엄청난 사건’임에 틀림이 없다.

2022년 <드라이브 마이 카>로 골든 글로브를 수상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전작 <아사코>의 주인공 ‘아사코(카라타 에리카)’는 사진 작가 ‘고초 시게오’의 <self & others> 전시에서 ‘바쿠(히가시데 마사히로)'를 만난다.

전시회장을 나서 다시 마주친 둘 사이엔 아이들이 바닥에 던진 폭죽이 터지면서 요란한 소리와 뿌연 연기를 내뿜고 있었고, 아사코를 응시하던 바쿠는 폭죽이 터진 자리를 지나 뚜벅뚜벅 그녀에게 다가오더니 말없이 키스한다. 둘은 당연하게도(!) 사랑에 빠진다.

그저 둘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신발을 사러 가겠다고 나간 바쿠는 아사코의 삶 바깥으로 사라진다. 연기처럼 고요히,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바쿠의 실종 후 오사카에서의 삶을 닫아버리고 도쿄로 거취를 옮긴 아사코,

아마도 바쿠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오사카를 견딜 수 없었으리라. 도쿄로 이사온 아사코 앞에 어느 날 바쿠와 똑같이 생긴 료헤이가 나타난다. 료헤이를 거부하고 싶었지만 아사코는 료헤이의 따스하고 다정한, 느리지만 성실한 태도에 마음의 문의 열고 다시 사랑할 용기를 얻는다.

갑작스레 찾아온 지진으로 온 도시가 혼란에 빠져있을 때 둘은 서로를 향한 마음을 비로소 확인한다. 그 사람 곁에 있어주고 싶다는 마음,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 이는 사랑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니던가.

아사코와 료헤이는 언제까지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런 결말을 기대했다. 현실 속 내 사랑의 행보는 울퉁불퉁하고 애매하고 때로 불행에 가까웠다 할지라도 다정한 연인들의 엔딩 앞에 붙이고 싶은 수식어는 역시 해피니까. 그러나 둘의 이야기는 그런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고, 료헤이와 함께인 아사코 앞에 느닷없이 바쿠가 나타난다.

스틸 컷= 아사코
스틸 컷= 아사코

언제가 되더라도 아사코에게 돌아오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왔다고 하면서, 지금이 바로 그 언젠가 라면서. 아사코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누구를 선택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바쿠를 선택한다고 아사코를 비난할 수 있을까?

료헤이와의 평화로운 삶을 응원하면서도 아사코의 마음에 남아있을지 모를 아쉬움이나 미련 같은 감정의 편린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무엇보다 어째서 운명이나 사랑은 전조도 없이 다가와 일상을 뒤흔들고 나를 혼란에 빠뜨리고 마는 걸까? 운명의 신은 악의적인 장난이 취미라도 되는 것인지, 한숨이 나올 뿐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영화 제목이 어째서 <아사코>인지 진심으로 공감하게 된다. 진부한 말 같지만 시련을 통해 사람은 성장하고, 자신의 선택이 뭐가 되었든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대가는 때로 길고 깊은 고통을 수반하며, 내 선택에 대해 스스로를 저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희망을 버리지 않음으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 존재가 아닐까? 아사코의 선택이 무엇이 되었든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면 진심으로 응원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내가 만일 아사코 였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나와 다른 길을 향해 갔다 해서 그녀를 동정할 수도 나무랄 수도 없다.

아사코는 꿈에서 깬 듯, 말끔하고 결연한 표정으로 자신의 선택한 사람과 나란히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본다. 이미 둘은 이런저런 상처를 주고받으며 전속력으로 달려왔기 때문에 평화로운 상태는 아니다. 차라리 지옥에 가까울지 모른다. 그치만 안다. 사랑은 서로를 바라보는 일 같지만 실은 나란히 서서 같은 곳을 응시하는 것임을. 영화의 마지막 대사처럼 더럽지만 아름다운 것, 그것이 사랑임을.

<아사코>는 영화 자체도 수작이지만 사실 다른 사건 때문에 굉장한 이슈가 된 작품이다. 당시 유부남이었던 '히가시데 마사히로'와 청순의 대명사였던 배우 '카라타 에리카'가 이 작품을 함께 찍는 동안 사랑에 빠져 영화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다.

둘이 사랑에 빠진 이유가 꼭 영화 때문만은 아닐 테지만 영화 속 배역이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자신 있게 말하기도 어려울 듯하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둘의 이야기에 나는 매운 술이 한 잔 마시고 싶어졌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맵싹한, 그러니까, 가고시마 산(産) 고구가 소주 같은 것을 얼음만 하나 넣어 원샷으로.

이미지= 고구마 소주
이미지= 고구마 소주

겨울에도 포근한 봄 날씨를 띠는 가고시마에서는 기온 때문에 낮은 도수의 술은 금새 변질이 된다. 술의 변질을 막기 위해 알코올 도수를 높이는 증류법을 이용해 소주를 만들었는데, 이때 화산재 토질에서도 잘 자라는 고구마를 이용하면서 독특한 풍미의, 알코올 도수가 25도 정도로 높은 소주가 탄생했고, 지금까지 가고시마의 시그니처 술로 이어지고 있다.

고구마 소주는 단식증류라 해서, 밑술을 한번 증류하기 때문에 재료의 풍미가 그대로 담기게 되는데 이를 일본어로 ‘쿠세’라 한다. 쿠세가 강하면서 알코올 도수마저 높기 때문에 고구마 소주를 마시면 ‘맵다’는 첫인상을 받게 되지만 일단 맛을 들이면 자꾸 생각이 나는 술이기도 하다.

게다가 어찌나 맑은지 투명한 잔에 따른 고구마 소주를 보면 한 모금 마셔보고 싶은 강렬한 유혹에 시달린다. 예고 없이 달려드는 운명적인 사랑처럼 투명하지만 강렬한 고구마 소주는 관자놀이와 식도를 따갑게 훑고 지나가지만 멈출 수가 없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의 끝이 숙취와 다를 바 없는 긴 괴로움이라 한들 누가 멈출 수가 있을까? 그러니 고구마 소주를 곁들여 영화 <아사코>를 보며 벼락 같이 다가오는 사랑의 시뮬레이션을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아니한가.

트레일러= 아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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