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도 단, 쓰지만 단, 어른의 맛 위스키
어른임을 실감하는 순간이 있다. 일테면 혼자 bar에 들어가 마실 술을 고를 때 이름을 아는 싱글몰트 위스키가 몇 종류 쯤은 되고, 40도가 넘는 독주를 스트레이트로 마셔도 미간을 한껏 찡그리지 않게 되었을 때 처럼,
혼술과 독주가 어색하지 않다는 건 혼자라는 이유로 흔들릴 만큼 쓸쓸하지 않다는 것, 독주의 맛보다 쓰디 쓴 사건을 지난 삶에서 꽤 경험했다는 뜻이리라. 프랑스의 네오누벨바그 감독 '미아 한센-러브'의 영화 '다가오는 것들'의 나탈리(이자벨 위페르)는 일견 완벽한 중년여인의 삶을 살고있다.
존경받는 고등학교 철학교사, 저명한 교수의 부인, 건강하게 자란 자녀, 본인 이름으로 출간된 교과서에, 오랫동안 좋은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멋진 제자의 존재까지. 우울증과 거식증을 앓는 허세로 뭉친 왕년의 모델 출신 모친이 골칫덩이긴 해도 그녀는 언제나 종종거리는 속도감을 차분하게 유지하며 그 많은 역할을 우아하고 빈틈 없이 일구어 낸다.
유일한 그녀만의 시간이란 출퇴근 길에 약간의 짬이 생길 적마다 손에서 놓지 않는 책과, 꽃을 향한 애정어린 시선 정도일 뿐이지만 그녀는 지금껏 그것을 '행복'이라 정의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삶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그 것도 동시다발적으로. 남편은 젊은 애인의 존재를 고백하며 집을 나가고, 잦은 자살 소동에 요양소로 보낸 엄마가 사망하기까지 이제 엄마의 고양이는 나탈리의 책임이 된다. 장성한 자녀들은 더 이상 그녀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이를 먹어' 더 이상 실천에 적극적이지 않는 나탈리를 애제자를 비롯한 '젊음'을 대표하는 '행동하던 과거의 나탈리들'이 비난한다. 심지어 그녀 이름으로 나오던 교과서 개정 판마저 중단 된다. 아내, 엄마, 교사, 작가, 엄마의 자랑스러운(이라 쓰고 못 다 이룬 꿈을 대신 이루어 주는 이라 읽는) 딸 등 어느덧 그녀가 붙들고 있던 타이틀이 그녀의 삶으로부터 하나 둘씩 사라져 간다.
그럼에도 영화의 제목은 '다가오는 것들' 이다. 어른으로 산다는 건 무얼까? 배우자의 외도로 인한 이혼에 쿨해야 하고, 자란 자녀들이 멀어져 가도 쓸쓸할 겨를 조차 없어야 하며, 생기로운 젊음 앞에서 '라떼는 말이야' 식의 꼰대어를 투척해서는 안된다.
세련되지 못한 태도는 지양해야 하며 사라져 가는 것들이 제 아무리 소중한 역사와 추억을 품고 있더라도 눈물을 꾹 삼키고 보낼 줄을 아는, 건조하고 단정한 지성으로 충만한 태도야말로 어른의 자격일까. 나탈리는 갑작스레 닥친 '자유'에 당황한다.
타인의 삶을 돌보는 일을 지극히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오던 그녀는 사라져 가는 것들 뒤로 다가오는 자신의 낯선 미래를 받아들여야 한다. 죽은 엄마 대신 돌봐오던 고양이를 먼 곳의 타인에게 '자의로' 보내는 나탈리의 선택은 그러므로 매우 상징적이다.
사람은 쉽사리 변하는 존재가 아니다. 무시로 사람은 거의 변하지 못 하는 존재에 가깝다. 앞으로 그녀는 자신의 딸이 낳은 손녀를 돌보는 삶을 살게 될 지 모른다. 그러나 그 또한 나탈리에게 다가온 새 미래이자 동시에 그녀가 가장 잘 하는 '인생살이'가 아닐까. 사람에겐 양가감정이 있다.
원하지만 원하지 않고, 슬프지만 후련하며, 기쁘지만 쓸쓸한. 이런 양가감정 속에서 시소를 타듯 균형을 유지하려는 과정이 인생으로, 시소의 반대 쪽에 무거운 존재가 앉게 되거나 또는 상대방이 시소에서 갑작기 사라져 버리면 일순 균형을 잃고 떨어질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그러나 곧 균형을 찾으려 애쓰게 될 것이다. 내 멋대로 내 시소를 내려올 수는 없기에. 행복은 원하는 것을 획득했을 때가 아니라 무언가를 진정 원하는 과정 속에 있다고 나탈리는 말한다.
그녀를 보며 이혼 후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던 나의 마음과 제대로 마주하기를 하고 싶어졌다. 무섭지만 또 설레기도 하는 양가감정 속에서 아껴둔 21년산 위스키를 한 잔 따랐다. 위스키의 맛은 쓰고도 달았다. 아니, 쓰지만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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