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계에 함몰돼서 서로를 원망만 하는 두 여자의 성장기

영화 '같은속옷을입는두여자'포스터&스틸컷
영화 '같은속옷을입는두여자'포스터&스틸컷

 

찰진 입담과 과하지 않은 장난끼로 대중을 사로잡는 심리학자, 아주대 김경일 교수는 ‘인내심의 총량’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 회사에서 인내심이 바닥난 사람이 퇴근하고 집에 오면 아주 사소한 것에 화를 내는 것을, 자주 예로 든다.

인내하고 노력하는 데에 드는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쓰려는 인간의 본능이, 나에게 친절하고 위험하지 않은 존재를 만나면 함부로 대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생각해보면 수긍이 가는 부분이다. 어려운 사람, 낯선 사람에게는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실수하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는 ‘고맙다’는 말은 오글거려서 싫다고 하는 우리.

가까운 사람, 가장 고마운 사람들, 때론 큰 상처를 주고도 사과하지 않는 관계. 하지만 손절도 거리 두기도 어려운 관계가, 가족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 내다 버리고 싶다’고 말한 감독도 있고, 많은 작품의 소재로도 자주 등장하는 가족 중,

모녀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헤아리기도 어려울 만큼 변주에 변주를 거쳐서 무한 재생산되고 있다. 그중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의 엄마는 한없이 희생하는 캐릭터와는 반대인 아주 독보적인 ‘어미’의 모습을 그려냈다.

영화 '같은속옷을입는두여자'포스터&스틸컷
영화 '같은속옷을입는두여자'포스터&스틸컷

 

‘이정’(임지호 분)과 ‘수경’(양말복 분)은 모녀관계다. 수경은 지금 딸 나이에 아이를 낳아 혼자 키웠고, 딸 ‘이정’이 20대 후반, 엄마의 그 나이가 되었다.

둘은 같은 집에 살지만 드라마 속의 살가운 모녀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외모관리도 철저하고, 일도, 연애도 열정적으로 하는 엄마 ‘수경’과 달리 ‘이정’에게는 활기도 숫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작품의 전반부에 이기적이고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엄마에게 맞으며 자랐으면서도 엄마의 관심과 사랑이 늘 목마른 딸의 모습을 보여주어 관객이 딸의 아픔에 공감하게 만든다.

전통적인 어미의 모습과는 아주 다른 매몰찬 엄마는 대놓고 ‘나쁜년’으로 보이고, 그 엄마에게라도 사랑받고 싶어하는 가여운 딸은 희생양처럼 보인다. 전통적이고 진부해서 지루해지기까지 하는 모성애 겹핍된 모진 어미상을 그려놓는 듯했다.

영화 '같은속옷을입는두여자'포스터&스틸컷
영화 '같은속옷을입는두여자'포스터&스틸컷

 

<같은 속옷을 입은 두 여자> 속의 어미 ‘수경’은 남자에 환장해서 모든 암컷의 유전자에 날때부터 심어져 있을 거라 기대하는 ‘모성애’ 따위는 엿바꿔 먹은 인물이다.

흔한 대사 ‘내가 너만 아니었으면~’으로 시작하는 수경의 넋두리는 딸의 마음을 후벼판다. 제발 사과 한 번만 해달라고 애원하는 ‘이정’의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나쁜 어미를 비난하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을까? 감독의 의도가 그리 단순했을까? 싶을 무렵 영화는 다른 시선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정이 어미를 떠나 회사 동료의 집에 빌붙으려는 모습에서 어미를 사랑하는 딸이 아니라 숙주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일어난다.
 

영화 '같은속옷을입는두여자'포스터&스틸컷
영화 '같은속옷을입는두여자'포스터&스틸컷

 

감독, 각본, 연출, 편집까지 일당백으로 만든 김세인 감독은, 1992년생 여자 감독이다. 어미보다는 딸의 입장으로 평생을 살아왔을 감독이, 관객에게 어미의 입장이 돼 봤느냐며, 묻는다.

성인이 됐으면 독립을 할 거라 기대하고, 자식이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면 돈귀한 줄도 알고, 생활비도 보태길 바라는 평범한 부양자의 마음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고마움은커녕 끝없이 원망만 하는 딸의 이기심을 슬며시 드러내는 후반부는, 부모가 한도끝도 없는 자식 부양의 의무를 지녔다고 믿고 있는 한국의 프레임에 잠시 멍해진다.

어미도 여자인 것을 우리는 자주 잊는다. 아니, 생각해 본 적은 있었던가 자문하게 된다. 

 

영화 '같은속옷을입는두여자'포스터&스틸컷
영화 '같은속옷을입는두여자'포스터&스틸컷

 

우리 사회는 ‘여자’가 ‘어미’가 되는 순간, ‘여자’를 버리라고 강요한다. 책으로 나와 영화로 제작된 <82년생 김지영>도 그렇고, 최근 작품 <첫번째 아이>도 같은 맥락이다.

여자에 대한 모진 프레임에서 ‘늙은’과 ‘어미’가 합쳐친 ‘수경’은 결코 호감가는 인물이 아니다. 특히나 ‘어미’의 프레임이 존재의 가치보다 우선시 되는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늙은 여자가 외모를 가꾸고, 비슷한 또래의 늙은 남자 앞에서 교태를 부리는 장면들은 자연스러움이나 사랑스러움과는 반대의 감정을 일으킨다.

무엇이 우리의 사고를 천편일률적으로 가둬둔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아이가 있는 여자의 감정과 욕망은 곧바로 이기적이고 직무유기로 연결되는 것일까?

영화는 갈등을 드라마틱하게 풀어내지 않는다. 갈등은 갈등대로 인정하며 서로의 인생을 있는대로 펼쳐놓고 끝낸다. 다만 관객에게, 정말 수경이 나쁜년인지 묻는 동시에 이정의 억울함과 분노가 온당한 것이냐는 질문도 함께 던진다. 

엄마의 집에서 쫒겨나듯 나온 첫 번째 가출과 다르게 두번째는 조용하지만 아주 당당하게 집을 나서는 이정의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무섭지만 스스로 어른이 되기 위한 독립적인 한 발을 내딛는 것으로, 영화는 성장영화로도 읽힌다.

영화'같은 속옷을 입은 두 여자' 스틸 컷
영화'같은 속옷을 입은 두 여자' 스틸 컷

 

일방의 편을 들거나, 한쪽을 비난하려는 의도 없이 그저 성인 대 성인의 삶을 보여주는 영화는, 엄마의 이름을 불러주는 수경의 남자친구와 그의 딸의 모습까지 겹쳐놓으며 아주 불편한 중년 재혼 가정의 문제도 보여준다.

20여년 전에는 여자 배우가 결혼하면 TV에 출연하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소위 주가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때쯤 배우 김혜수가 동거예찬론을 펼쳐서 한동안 이슈가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후로 20여년 동안 세상도 인간관계도 사회적인 젠더에 대한 인식도 많이 바뀌고 개선됐다. 하지만 어미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어떤지 생각해 보게 된다.

전통적인 어미, 엄마는 희생의 아이콘이고 무한 사랑의 화신이어야 한다는 강박은 감히 넘을 수 없는 금단의 땅이 돼 버린 느낌이다.

수퍼우먼이 될 자신이 없으면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된 어미의 영역에 인간적인 많은 감정을 용납하는 여유를 만들어줘야 대한민국의 소멸을 예고하는 저출산과, 막장같은 젠더 이슈와 갈등에 해결의 틈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견해 본다.   

영화 '같은속옷을입는두여자'포스터&스틸컷
영화 '같은속옷을입는두여자'포스터&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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