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환경이 힘들면 아이는 빨리 철이 든다.

 

서정주 시인의 시 「자화상」은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한다. 그리고 중간쯤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다양한 글에서 자주 인용되는 문장이라 출처는 몰라도 한번쯤 들어본 적은 있는 문장이다.

애비가 종인 자식을 키운 건, 바람. 그저 부는 자연현상 바람일 수도 있고, 모진 세상의 멸시와 풍파로도 읽을 수 있다. 신분제가 있던 시대에 종의 자식으로 태어난 아이의 고충은 짐작할 만하다. 녹록치 않은 시대를 살아가면 아이들은 빨리 철이 든다.

 

영화 '가버나움' 포스터
영화 '가버나움' 포스터

 

영화 <가버나움>은 제71회 칸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작으로,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를 고소하는 12살 소년의 이야기다. 소위 말하는 ‘인생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으로 열두 살 소년의 모진 인생과 가족애에 탄복하게 되는 수작 중 수작이다.

감히 타인의 인생에 ‘안쓰럽다’는 어줍잖은 연민을 갖지 못하게 하는 단단한 의지와 삶에 대한 진지함을 배울 수 있는 작품인데 주인공은 ‘자인’이고 실제 이야기이며, 주인공도 실제 인물이 연기했다. ‘자인’을 키운 것도 부모가 아니라 환경이었다.

 

2. 어른의 조건

 

선조보다 물자도 음식도 풍부해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평균키와 체격은 좋아졌고, 교육수준은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할 대상이 없을 만큼 최고다. 하지만 더 강인한 신체와 정신이 탑재된 건강한 모습이 아닌, 미성숙한 모습에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2023년 우리의 청년들의 결혼 시기는 점점 늦춰지고 있고, 심지어 할 필요가 있냐는 의견도 다수다. 최근 발표된 자료를 보면 2인 가족과 1인 가족의 합이 거의 50% 육박하고, 10명 중 3명은 경제불안과 육아부담이 싫어서 혼자 살겠다고 한다.

자신의 몸 하나도 감당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타인을 부양하거나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귀찮음이 아니라 공포에 가까운 것이다.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청년들에게 책임을 묻거나 그들의 선택이 옳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현재 모습을 직시해보자는 취지다.

최근 개봉작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20대 후반의 미혼딸이 어미의 집에 살면서 겪는 불협화음이 주제다. 성인 자식이 늙은 부모에게 얹혀사는 문제는 영화 속 이야기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주로 ‘캥거루족’이나 ‘패러사이트 싱글’이란 용어로 불리며 유럽에서는 죽은 아비의 연금을 받으려고 사망신고를 하지 않은 채 살아온 자식이 경찰에 검거된 뉴스도 있었다.

동양과 서양이 똑같이 겪는 문제다. 늙은 부모와 독립하지 못하는 자식의 문제는 누구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복합적인 요인들의 결과다. 그래서 해결이 쉽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몇 살이 되면 어른이 되는 걸까? 어른은 무엇을 할 수 있어야 하는 존재일까?

 

3. 역사 속 인물에서 친근한 이웃이 된 안중근,

뮤지컬 <영웅>의 탄생

 

2009년에 대한민국 창작뮤지컬의 큰 기둥이 되는 작품이 탄생했다.

바로 뮤지컬 <영웅>이다.

 

뮤지컬 '영웅' 포스터
뮤지컬 '영웅' 포스터

 

1990년 초부터 시작해서 뮤지컬 장르가 자리잡기 시작할 때는 주로 라이센스 작품 위주였다. 그 후 중소형 창작뮤지컬은 성공한 사례가 여럿 있었지만, 대형뮤지컬의 성공은 드문일이었기에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뮤지컬 <영웅>은 신나고 즐거운 시대가 아니라 아픈 역사 속 인물이기에 역사의식 고취 목적이지 않을까 우려도 됐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서른 개가 넘는 세련된 넘버들과 스테레오식의 강인한 영웅의 모습에 국한된 안중근이 아니라, 친근하고 인간적인 안중근과 함께한 우리의 독립군들이 역사책 속에서 튀어나와 함께 웃고 울며, 관객들에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영화 '영웅' 스틸컷
영화 '영웅' 스틸컷

 

그때 비로소 멀게만 느껴졌던 안중근의 인생이 보이기 시작했고, 우리와 다른 특별한 인물이 영웅이 되는 게 아니라, 한 개인의 간절한 바람이 개인을 버리고 대의를 향했을 때 만들어내는 엄청난 에너지와 결과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아주 멀게만 느껴졌던 역사 속 사건들이 불과 100년 전 우리의 현실이었다는 사실들이 새삼 날카롭게 자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삶을 살다 간 안중근과 가족들

20대에 세 아이의 아비가 돼서 나라 잃은 망국의 국민으로서 독립군이 된다는 것은 어떤 마음을 먹어야 가능한 것일까? 사랑하는 장남이 전장으로 가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막지 않는 어미의 마음과 사랑하는 지아비 바지가랑이라도 붙들고 안된다고 반대하고 싶었을 텐데, 고이 보내주는 아내의 마음은 무엇으로 가능했던 것일까?

 

영화 '영웅' 스틸컷
영화 '영웅' 스틸컷

 

무서웠을 테고, 두려웠을 텐데, 도망가고 싶었을 테고, 아팠을 텐데, 나 아니면 안된다는 사명감은 도대체 어떤 인간에게서 가능한 것일까를 계속 되뇌이며 작품을 감상했다.

안중근이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대한민국 독립군 대장이라고 밝히며 재판을 받고 사형을 받은 나이가 31살이었다.

 

서른 한 살!

나와 당신의 서른 한 살은 스스로의 인생도 책임지기 버거워하던 찌질함이 아니었던가. 아무리 상황과 환경이 키우는 거라해도, 서른 하나에 스스로의 흔들리는 마음과 동료들의 두려움까지 다독이며, 멀리 고향에 있는 늙은 노모와 눈에 밟혀서 마음 짠해지는 세 아이와 자신을 기다리는 아내의 눈빛을 어찌 이겨냈을까.

 

5. 국뽕없이도 일본인들의 댓글이 만들어낸 애국심

다양한 작품 속 안중근은 허구의 히어로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이며 실제 존재했던 인물이다. 불과 100여 년 전에 서른살의 짧은 삶을 살다 간 우리의 이웃이 ‘영웅’이라 불리고, 다양한 장르를 미끄러져 다니며 재생산되고 있다. 안중근은 우리에게 조국은 당연히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누리는 평화 역시 소중한 것을 모르고 방치하면 유지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영화 '영웅' 스틸컷
영화 '영웅' 스틸컷

 

너무나 익숙해서 당연한 것들, 인간의 생존에 기본이 되는 물과 공기가 오염 수위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비가역적인 현상이 된다는 경고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우리에게 조국과 평화는 그런 것이다.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해서 함부로 하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비가역적인 상황이 돼 버리는 것. 안중근은 그렇게 말한다. 나 역시 두려웠지만 간절히 바라고 원했던 것이 있었고 하늘에 기원하며 목숨바쳐 최선을 다했노라고

개인을 버리고 대의를 택한 안중근의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세계속에 당당히 선두를 지켜나가며 꾸준히 발전해나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위상을 생각해 본다.

대한민국의 여권만으로 못 넘는 국경이 거의 없을 정도로 세계 속에서 인정받는 국가는 지금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이지만, 안중근은 제대로 된 변호조차 받지 못한 반쪽짜리 재판을 받았고, 그의 시신은 어디에 있는지 아직도 밝히지 못했다.

2023년 우리가 헬조선이라 욕할 수 있는 조국을 지켜준 안중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세계가 인정하는 뮤지컬이 엄청난 자본과 뛰어난 배우들의 열연으로 영화화됐다. 하지만 우리 관객들은 다양한 이유로 까고 있고, 일본에서는 테러리스트를 영화화했다고 국교단절을 운운하고, 911테러리스트와 비교하고 있다.

 

※YTN 뉴핵관의 서경덕 교수 인터뷰 장면

 

일본은 왜곡된 역사관을 공중파와 교과서에서 세뇌시키고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며 도쿄 긴자거리에 '독도박물관'을 만들었다. 또 매해 일본의 지역 축제에서 독도를 기리는 행사를 하면서  독도를 세계적인 분쟁지역으로 만들려는 빌드업을 계속하고 있다.

'안중근 박물관'에 대해 일본의 전 총리는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라고 공공연하게 낙인을 찍으며 자기 땅도 아닌 것을 욕심내고 역사 왜곡을 반복하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인가.

연출이 어떻고 노래가 어떻고 '국뽕'이 어떻다는 이야기로 서로에게 폄훼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우리의 문화 역사는 우리의 관심과 인식이 지켜줄 텐데 하는 우려가 떠나질 않는다. 어떤 작품을 감상하고 평가하는 것은 개개인의 권리이자 취향이다.

하지만 호평보다 악평이 멋져보이고, 전염성도 강한 속성을 한번쯤 생각해 보자고 제안해본다. 우리는 소위 전문가들의 악평에도 천 만을 가는 작품들도 수없이 보질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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