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준우 연출, 연극 <파우스트>를 보고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

만족을 모르는 인간의 속성이 낳는 폐해는 다양하다.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아는 것은 행복의 핵심 열쇠이자 자신의 노력을 가성비 좋게 배열하는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취미를 무엇으로 할지,

이 정도 회사라면 괜찮은 것인지를 다수에게 묻고 또 물어 타인의 의견에 용기를 내어 함께 가보려는 사람들이 많은 요즘이다. 포털에는 다양한 ‘국룰’에 관한 설문과 토론이 난무하고, 무엇을 하든 ‘요즘’, ‘대세’ 혹은 ‘핫플’들이 넘쳐나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안빈낙도’라는 말은 이미 사어가 돼 버렸고, 시대를 읽지 못하는 묘한 이질감마저 든다. 미래를 고민하는 청소년들에게 ‘네가 좋아하는 걸 하라’는 조언 역시, 뻔한 말이 된 지 오래다.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라고 규정한 정신분석학자 라캉의 말은 여전히 시대를 관통해서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고 있다. 다양한 매체에서 넘쳐나는 광고에는 ‘나의 욕망’이 되고 싶어하는 ‘타인의 욕망’이 범람하고, 소비자의 오감을 자극적으로 후벼파는 시대다.

 

대전예술의전당 자제제작연극 파우스트, 프로그램
대전예술의전당 자제제작연극 파우스트, 프로그램

 

‘순간에 만족’하여 파우스트가 내뱉는 말,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고대하던 말이다. 학문과 세계에 대한 진리탐구로 일생을 바친 늙은 학자가 죽음 목전에서 삶의 부질없음에 괴로워할 때, 인간의 성욕과 물욕과 권력욕을 채워주면 내기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 악마가, ‘인간의 입에서 듣길 원한 말’이다.

파우스트의 영혼을 걸고 신과 내기를 한 메피스토펠레스는, 신의 대척점인 악마로도 읽히고, 파우스트 내면의 어두운 부분이자 그림자로도 해석된다.

세상을 이해하고 신의 뜻에 순응하며 평생을 살았지만 결국 이뤄낸 게 없다고 느낀 파우스트의 인간적인 허무와 삶에 대한 욕망이 만들어낸 악마, 메피스토. 악마와 신이 인간의 영혼을 건 내기를 하고, 인간은 또 다른 삶을 살아가는 여정이 희곡 <파우스트>의 핵심 줄거리다.

 

 

대부분 알지만, 읽지 않는 고전, 들어는 봤지만 어려울 거란 편견이 지배하는 책 <파우스트>는 작가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평생역작으로 1, 2부로 나뉘어져 있다.

1부는 1808년에 출간하고, 23년 후, 1831년에 2부가 완성된다. 1부 출간 후에도 끊임없이 수정을 한 괴테는 2부를 완성하고도 바로 출판하지 않았다.

1832년 작가 사망 후 그의 유지에 따라 사후 출판됐다. 결국 파우스트 박사의 경험들은 괴테가 평생을 살면서 경험하고 고민하고 만났던 인간군상의 총합인 셈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하우스 내부 및 입장권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하우스 내부 및 입장권

 

83세까지 왕성한 작품활동으로 독일 문학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위대한 작가로 평가받고,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 <괴테하우스>로 보존되어 독일을 넘어서 전세계인들에게 사랑받는 위인이 된 괴테는, 다양한 장르의 문학을 넘어서 자연과학과 미술에도 업적을 남겼으며 바이마르 공국의 요직에 있었던 정치가이기도 했다.

다양한 경험과 끊임없이 학문에 매진한 ‘근면한 천재’였던 괴테의 <파우스트>는 80여 년의 생애 동안 체험하고 생각한 인생과 사상을 인간 보편의 고민으로 승화시켜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괴테의 또 다른 작품, 1774년에 발표한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독일의 젊은이들에게 ‘베르테르 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던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이 바탕이 된 러브스토리이며, 이 작품 역시 다양한 장르로 확장되어 현재도 무한 변주 중이다.

‘고전주의 시대의 르네상스맨’이라고 불리는 작가, 베르테르의 감수성을 가진 괴테는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의 등장 같은 굵직한 사건들을 온몸으로 겪으며 살았다. 변화무쌍한 역사적 사건들과 함께 한 80여 년을 바탕으로, 인간의 삶에 대한 무한한 욕망과 그에 턱없이 부족한 인간의 유한함과 한계에 대한 아쉬움을 진지하게 파고들어 <파우스트>에 함축시켰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늙은 박사, 파우스트, 신과 학문에 대한 통찰에 일생을 바쳤지만 결국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고, 결국 죽기까지 아무것도 깨달을 수 없을 거란 절망감에 통탄할 때 만난, 메피스토펠레스. 악마의 선물로 다시 찾은 젊음과 무엇이든 가능해진 브레이크 고장난 방종의 끝판. 원하는 건 무엇이든 가능해진 삶을 살아가는 파우스트의 삶의 궤적이 희곡 <파우스트>다. 스토리도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삶의 굴곡마다 고난과 절망, 선택과 후회를 거듭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인간 그 자체다.

삶 속에서 ‘방황이 숙명’인 인간이 순간에 만족하여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말할 리 없다는 파우스트가 만약 그렇게 황홀한 순간을 만나게 된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넘기고 기꺼이 파멸하겠다는 약속을 한 비관적인 인간. 메피스토는 악마라기보다는 어쩌면 극강의 행복과 충만함을 경험하고 싶다는 희망의 다른 모습이고, 그렇게 될 리 없다는 인간의 절망이 파우스트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방탕을 즐기다 우연히 만난 순결한 처녀, 그레트헨과의 사랑(성욕), 그녀를 사랑했고 행복한 것도 찰나. 임신한 그레트헨의 어미와 오라비는 죽고 사생아가 된 아이를 어미가 제 손으로 죽인 그레트헨이 법의 심판을 받을 때까지 버려둔 파우스트는, 자책하고 자살을 시도한다.

이대로 파우스트가 죽어버리면 내기에서 지게 된 메피스토가 제안한 망각, ‘망각은 시간이 아니라 의지니까’

그렇게 다시 삶을 살아가는 파우스트는 봉건제국의 황제의 궁정에서 화폐를 찍어내는 자리에 올라(물욕) 황제의 총애와 정치 경제의 핵심 권력을 잡기도 하고(권력), 최고의 미녀와 결혼하여 천재 아들을 낳아 살다가도 다시금 절망에 빠진다.

그리고 개인의 욕망이 아닌 공공이익을 추구하는 개발자가 돼서 개간으로 비옥한 토지를 만들어서 궁핍한 인간을 도울 계획을 세우지만, 개인의 욕망이든 다수를 위한 노력과 희생이든 한 인간의 허무함과 결핍은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종국에는 결국 잊지 말아야 할 사람을 잊은 것 같은 결핍, 채워지지 않는 허망함에 괴로워하며 죽어간다. 시력도 잃고 다시금 분노와 허탈감에 매몰되는 그때. 눈도 귀도 먼 아이, 자신의 사생아를 만나, 외치는 말.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기고 파멸이 약속된 그 말을 하는 순간이다.

원작은 신의 은총과 구원이 있고, 자신이 버린 순수한 여인 그레트헨의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구원의 은총을 받는 것으로 끝이 난다. 종교적으로 느슨한 결말이라고도 평가받는 부분이지만, 그 시대상을 반영한 작품이므로 종교적인 색채를 존중한다.

스스로 통제가 안 되고,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인간의 삶에서 무한한 생명과 재능, 그리고 성욕과 물욕, 권력욕을 모두 채워주었지만, 인간의 순수에 가까운 삶에 대한 열정과 생명력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한 그 순간에 있었다는 깨달음을 주는 작품이다.

그녀와의 사랑에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로 갈등하고, 결국 이것이 내가 원한 것인가, 여기서 멈추면 나는 후회하지 않을 것인가,를 의심하던 순간, 사랑하는 그녀를 잃고 파우스트는 ‘망각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인생은 이것이 ‘다’가 아닐 것 같은 두려움, 이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을 거라 막연한 기대, 그리고 지금보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발전하고 더 근사해질 거란 욕심. 그렇게 개인을 넘어서 집단의 욕망까지 충족시키며 영향력을 넓혀간다면 삶이 더 충만해질지도 모른다고 고민하던 나약한 인간은, 결국 자신이 하찮게 잊었던 그녀의 사랑으로 구원받는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숙명같은 이 명제는, 노력하지 말라는 말인가? 아니면 방황은 필연적인 형벌이란 말인가? 다양한 해석도 가능하고, 서로 다른 감상도 가능한 열린 작품이라서 더 생동감 넘치지만, 결국 인간의 삶에 대한 고민과 모든 선택과 결정의 순간에 후회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노심초사하는 인간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어서 더욱 매력적이다.

 

연극 파우스트 커튼콜
연극 파우스트 커튼콜

 

“나란 존재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자아를 찾아 끝없이 방황하는 파우스트의 절규는 괴테 자신이 스스로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이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끊임없이 방황하고 갈등하는 존재라는 의미인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는 대사는 괴테가 살던 2백 년 전 독일에서나 2022년 대한민국에서나 통용되는 고민인 게 확실하다.

문득 김만중의 <구운몽>과 괴테의 <파우스트>가 같은 궤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인간이 가진 욕망은 성욕과 물욕과 천하를 호령하는 권력욕이 대부분인데, 이 세 가지 욕망은 끝없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결국 인생은 일창춘몽임을 깨달은 성진처럼, 파우스트 역시 세상을 가졌고 만인을 이롭게 하는 큰 꿈을 이루더라도 인간의 욕망이 채워지는 경험을 못한다는 걸 깨닫게 하는 게, 작가의 조언이 아니었을까?

약혼자가 있는 여자, 로테를 사랑했던 베르테르의 열망은 목숨을 걸어도 가질 수 없는 절절함이었다. 가진 것보다는 가지지 못하는 것을 욕망하는 헛된 꿈이 결국 행복할 수 있는 유한한 인간의 삶의 시간을 그나마 단축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라는 가르침, 만약 운좋게 지금 행복한 것,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 보라는 19세기의 선배로부터 날아온 편지 같은 느낌의 작품이다.

인간 내면에 대해 고민하고 탐구한 <파우스트>는 200년의 시간과 물리적인 공간을 뛰어넘는 인간 보편의 고민을 포착해 낸다. 더 나은 존재를 향한 희망과, 더 행복해지려는 본능을 품고있는 고전으로 다양한 깊이와 폭넓은 학문적인 논의를 가능케 하는 고전이지만, 추운 겨울 다시 만난 파우스트 박사의 고민들은 힘겨운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2022년의 우리에게 조용하고 소박한 위로를 건네는 듯하다.

 

연극 파우스트, 커튼콜
연극 파우스트, 커튼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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