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로남불’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말이지만 사실 사랑(연애)은 기본적으로 죄다 ‘내로남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온갖 괴상한 행동들에 ‘사랑이었다’를 붙이면 고개를 끄덕인다. 나 스스로를 그렇게 납득시킨다. 이건 사랑(로맨스)이니까 괜찮고 말고, 라면서.

그런데 대체적으로 남의 연애질엔 그런 생각이 안 드니 이를 어쩔...! 오죽하면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다 나왔을까? 하기사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바보가 된다. 문제는 바보로 지내는 그 시간이 리코리쉬(감초)처럼 달콤하고 피자처럼 따끈따끈해 계속해서 리코리쉬와 피자를 원한다는 것.

1973년 캘리포니아의 산 페르난도 밸리, 태양이 가득한 어느 여름날 15세 소년 ‘개리’는 25세의 ‘알라나’에게 말 그대로 한 눈에 반한다. 소년의 사랑은 막무가내다. ‘알라나’의 이성과 상식은 개리와의 연애라니 말도 안 된다고 외치지만 알라나도 내심 개리의 행동이 싫지 않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 <리코리쉬 피자>는 개리와 알라나의 ‘사랑의 행로’를 그린 영화다. 사랑은 상대를 향해 무조건 달려가는 일이란 걸 그들은 본능적으로 잘 알고 있다. 그가 곤란에 빠졌을 때, 그녀가 외로움에 흔들릴 때, 그들은 뒤를 보지 않고 상대를 향해 내쳐 달린다.

때로는 기름이 ‘엥꼬’난 대형 트럭을 경사에서 후진으로 몰고 내려오는 모험을 해야만 하는 순간도 있지만, 사랑이라는 이유 앞에서 위험은 감수를 할지 말지 고민할 항목이 아니다. 그들에겐 모든 순간이 눈부시다. 갑자기 하늘에서 개구리가 비처럼 내린다 한들 사랑에 빠진 청춘들은 환호할 것이다. 그래, 뭣이 중헌디. 사랑이 중허지.

스틸 컷= 리코리쉬 피자(Licorice Pizza)
스틸 컷= 리코리쉬 피자(Licorice Pizza)

묘하게, 영화 <리코리쉬 피자>를 보며 ‘웨스 앤더슨’ 감독의 <프렌치 디스패치>를 떠올렸다. 어릴 때 명절 선물로 받는 과자 회사의 ‘종합선물세트’에는 내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또 인기가 별로인 종목이 반드시 한두 개는 끼어 있었다. 나는 종합선물세트의 그런 점이 정말 짜증이 났다. 선물세트라며? 그럼 내가 좋아하는 종류로만 채워져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라는 불만이 있었던 것.

종합선물세트의 탄생 배경이 잘 팔리지 않는 제품의 재고소진에 있다는 걸 알았을 적엔 이미 커버린 후라서 종합선물세트 자체에 대한 흥미라고는 개미 오줌만큼도 남아있지 않아 배신감조차 들지 않았지만 말이다.

헌데 위 두 영화에 내가 감동한 까닭은, 두 영화 모두 내가 좋아하는 맛으로만 가득 채운 종합선물세트 같았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아무거나 집어도 꽝이 없는 상자, 봉지를 열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과자들, 심지어 패키지까지 예쁜.

중년에 접어든 내가 사랑을 위해 막무가내로 달리기에는 감정의 폐활량이 노화로 약해졌고 다리는 무겁기 짝이 없다. 어느덧 달리기라는 종목은 하기 싫은 운동으로 각인된 상태다. 남은 생(生) 동안 과연 내가 사랑을 이유로 달릴 일이 생기기나 할까? 행여 찾아온다 한들 정중하게 사양하고 싶다.

사랑이 희박한 세상에서 숨 차는 일 없이 천천히 걸으며 고요히 늙어가는 걸로 되었다. 종종 과거라는 달콤 쌉싸름한 향수에 젖는 걸로 충분하다. 지나버린 추억이니 조작 좀 하면 어떤가? 내게도 한 때는 개리와 알라나처럼 숨이 턱까지 차오르건 말건 힘껏 너를 향해 달렸던 순간이 있었으니.

남들 눈엔 바보 같이 보였을지 모르지만 상관없다. 내가 하면 로맨스니까, 감초처럼 달콤하고 피자처럼 뜨거운. 그러므로 젊은 그대들은 일단 달리자. 내로남불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나’다. 로맨스에 방점을 찍고 바보처럼 달려도 된다. 언젠가 달리기가 싫어지는 날이 올 테니 달릴 수 있을 때 마구 달려야 한다.

사진= 흑맥주 '스타우트'
사진= 흑맥주 '스타우트'

영화 제목인기도 한 ‘리코리쉬 피자’는 70년대 캘리포니아에서 인기가 많았던 레코드 샵의 이름이자 레코드판(LP)을 가리키는 은어다. ‘리코리쉬(licorice)’는 감초를 뜻하는데, 영화 제목 덕분인지 감초 향 그윽한 흑맥주 한 잔이 간절했다.

특히 상면발효 방식으로 주조되는 ‘스타우트’는 검게 될 때까지 로스팅한 보리와 캐러멜 맥아를 사용하여 표면 발효로 만들어지는 맥주로 감미가 있어서인지 감초 뉘앙스가 느껴지면서 부드럽지만 진하다.

스타우트는 짙은 풍미로 인해 맥주 자체의 맛도 좋은데다가 도우가 두툼하고 고기가 잔뜩 올려진 기름진 피자와도 상당히 궁합이 괜찮다. 보통 피맥(피자와 맥주) 하면 짜릿한 라거 맥주를 떠올리지만 리코리쉬(감초) 향이 감도는 스타우트와 피자도 꽤 어울리는 조합이다.

더 이상 사랑에 빠질 가능성은 없을 테지만 리코리쉬 향 맥주와 피자를 즐기는 일, 그리고 타인들의 로맨스를 보는 일은 즐겁다. 어쩌니 저쩌니 해도 내로남불 말고 내로남로(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해도 로맨스)로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한가!

포스터= 리코리쉬 피자(Licorice Pizza)
포스터= 리코리쉬 피자(Licorice Piz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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