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다음)=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
사진출처(다음)=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
포스터(영어판)=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
포스터(영어판)=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

1999년 어느 가을, 한 독일인 사업가가 헝가리의 오래된 레스토랑에 방문한다. 추억에 잠긴 눈으로 레스토랑을 둘러보던 사업가는 레스토랑의 악사에게 어느 곡을 연주해 달라 요청한다. 느리고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자 사업가는 갑자기 가슴을 쥐어뜯으며 쓰러지고 누군가 비명을 지른다.

이건 저주의 노래야! 라며. 곡명은 <Gloomy Sunday>. 이 곡은 헝가리에서 ‘자살 유발곡’ 으로 유명하다. 오래 전 ‘싸이월드’라는 SNS 계정의 배경음악으로 ‘빌리 홀리데이’ 버전의 재즈곡 <Gloomy Sunday>를 걸어 둔 적이 있다. 당시 친한 선배가 너는 노상 이런 곡만 들으니 매사에 우울한 거 아니냐는 타박을 했던 기억이 난다.

‘빌리 홀리데이’는 차가운 가을비가 내리는 밤 골목을 배회하던 길고양이가 미처 비를 피하지 못 해 골목 구석에 웅크린 채 꺼져가는 토해내는 비명처럼 ‘그릉 그릉’ 낮게 우는 것만 같은 목소리로 이 곡을 불렀고, 그건 마치 명치를 얇은 눈썹 칼로 ‘지익’긋는 통증에 준하는 예리한 슬픔을 감각하게 했다.

마치 우울의 힘이 이토록 깊고 무서운 거라 경고라도 하듯이. Gloomy Sunday는 1933년 헝가리에서 발표된 ‘레조 세레스’의 곡이다. 이 곡을 듣고 자살한 이가 많아 이 곡엔 어느덧 ‘자살 유발곡’ 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단기간에 100명이 넘는 자살자가 속출했고, 그들이 자신의 목숨을 저승이라는 벼랑으로 툭툭 던지기 직전까지 이 곡을 들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공교롭게도 이 곡을 만들고 부른 ‘레조 세레스’와 그의 약혼녀마저 자살로 생의 마침표를 찍었다.

이쯤 되면 이 곡에 사신(死神)이라도 들러붙어 있는 것이 아닌지 합리적 의심이 가능하겠다. 물론 이 일화에는 상당한 과장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요새 말로 하자면 ‘어그로 마케팅’이었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사실로, 당시의 헝가리는 자살률 1위국 이었다는 것. 나치가 휩쓸고 간 비극의 역사, 축축한 날씨, 아름답지만 쓸쓸한 정서로 가득한 도나우 강, 극심한 빈부 격차 등, 자살 1위국 이라는 오명 안에 담긴 실상은 이랬다.

게다가 원곡의 가수 ‘레조 세레스’는 Gloomy Sunday 이후 단 한 곡의 히트곡도 내놓지 못 했고, 짙은 좌절은 그를 자살로 모는 데 크게 한 몫 했을 것이다. 결국, 곡 자체에 어떤 저주의 힘이 담겼다기보다는 저마다의 사연으로 자살을 선택한 자들이 마지막 가는 길의 동행으로 이 곡을 삼은 것이 아닐까?

진실이 무엇인지는 누구도 알 길 없으나, 당시 헝가리 정부는 이 곡을 위험한 곡으로 지정해 대대적으로 금지시키는 바람에 원곡 악보의 행방 또한 묘연해졌다.

지금 우리가 듣는 Gloomy Sunday는 재해석을 거친 곡이자 많은 버전 중에서도 '빌리 홀리데이'가 부르는 Gloomy Sunday는 차라리 이 곡의 처음이 그녀이기를 바라게 할 정도로 아름답고 처연하다.

1999년 ‘롤프 슈벨’ 감독의 <글루미 선데이>는 이 곡을 모티브로 해 쓰여진 원작 소설을 스크린으로 옮겨온 것이다.

영화 <대부>와 함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화'로 선정 되었을 만큼 장면 장면이 유럽 화가가 그린 명화처럼 펼쳐지는데, 한 여인을 향한 사랑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인물들을 어떻게 변모시키고 망가지게 하는지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 속, 피아니스트 ‘안드라스’가 ‘일로나’를 위해 연주하는 곡도 인상 싶지만 더욱 놀라운 건 당시로선 파격이라 할 만한 ‘폴리아모리(다자연애)’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일로나’를 사랑하는 ‘자보’와 ‘안드라스’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사랑이라는 감정으로부터 시작된 구속의 욕구를 의지로 배제하는 것이 가능한지, 혹은 한 사람이 동시에 두 사람을 사랑하는 상황이 일어날 수 있는 건지,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무척 혼란스러웠다.

그 후 세월이 흘러 그간 경험한 온갖 징글징글하고, 벅차고, 수선스럽고, 상처를 핑퐁처럼 주고받으면서도 눈부시기 짝이 없었던 지난 연애의 경험은 나로 하여금 그 모든 것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했다.

그 후 다시 보게 된 영화 <글루미 선데이>는 새롭고 각별하게 다가왔다. 상대의 전부를 가지지 않아도 괜찮은, 나를 보아주지 않아도 그저 그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 행복할 것 같은 순간은 내게도 있었다.

처음 이 영화를 볼 적엔 한 여자와 두 남자로 이루어진 기묘한 사랑의 형태에 동감(sympathy)을 찾으려 애썼다면 그 후엔 사랑이 가지는 다채로운 빛깔에 공감(empathy)의 붓질이 가능해졌다 할까. 사랑은 희생을 담보로 삼는다고들 한다.

과연 희생을 담보로 하는 사랑의 형태는 옳은가? 어쩌면 우리는 사랑이란 말을 익스큐즈로 삼아 상대를 향한 희생을 자처해가며 상대에게 나를 향한 감정을 구걸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랑이 그런 등가교환으로 이루어져도 괜찮은 걸까? 사랑으로 시작된 에로티즘은 선하다.

그러나 그 에로티즘을 소유의 시선으로 다가가 취하려 하는 순간 사랑의 천사성은 파괴되고 탐욕과 지배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므로, ‘일로나’를 억지로 취한 ‘한스’가 ‘일로나’를 향한 연모의 감정이 탄생한 추억의 장소에서 마침내 아들(일로나와 한스의) 손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마지막까지도 사랑의 천사 성을 놓지 않으려 했던 ‘일로나’의 합당한 응징이다.

‘일로나’는 아들의 생물학적 아비를 그런 방식을 통해 없애는 것으로 아들의 태생적 원죄를 소거했음에 다름 아니다. 이 결말을 단순하게 복수로 볼 수 없었던 이유도 그에 깃든다. 사랑은 본디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고통과 비탄에 빠트리고 일그러진 욕망은 내 안의 악을 휘저어 괴물로 만들기도 한다.

영화 <글루미 선데이>속 인물들처럼 사랑하라는 말은 도저히 하기 어렵지만, 그들의 사랑에 마냥 축복을 보낼 수는 없지만, 사랑이 가진 천사 성 그 힘을 그래도 믿고 싶다 생각하며 빌리 홀리데이가 부르는 Gloomy Sunday를 몇 번이고 반복해 들었다.

디저트 와인의 대명사 하면, 대개는 프랑스 소테른 지방의 샤토 디켐 등을 떠올리지만 사실 귀부(고귀한 부패)와인의 시작은 헝가리 동북쪽에 위치한 토카이 지방이다.

1690년 세계에서 처음으로 포도의 귀부균(포도의 수분을 빼앗아 당도를 높이는 푸른 곰팡이균)으로 달콤한 귀부와인을 양조했을 뿐 아니라 1737년 공적 등급제(푸토뇨시)를 실시하는 등, 격조 있는 디저트 와인을 만들어왔다.

그러나 세계 2차 대전의 비극은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와인들의 왕, 왕들의 와인’이라 격찬한 토카이 와인에도 똑같이 영향을 미쳤다. 공산주의 정권은 와인의 양적 생산 확대에만 관심이 있었고 품질 관리에는 소홀해 토카이 와인의 명맥 또한 희미해져 갔다.

그러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90년 극적으로 토카이 와인의 르네상스가 시작된다. 앞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토카이의 귀부와인에는 ‘푸토뇨쉬’라는 이름의 등급이 존재하는데, 이 단위는 ‘푸토니(작은바구니)’에서 유래한 것으로 베이스 와인에 몇 푸토니의 귀부포도가 담겼느냐를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아주 단순하게는 ‘당도’를 표시한 등급으로 보면 된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런 등급제 기준이 사라져 단순히 잔류 당분으로만 이 등급이 정해지다 현대에 와서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토카이 귀부와인은 농밀한 황금빛 액체에, 입에 머금는 순간 현기증이 돌 만큼 깊은 단맛이 폭풍처럼 밀려드는데, 그래서인지 과거에는 토카이 와인을 최음제로 여겨 왕족이나 귀족의 침대 곁을 지킨 역사도 있다.

짙은 단 맛이 잦아들면 천천히 씁쓸한 맛이 찾아오는데 이게 마치 사랑의 행로와도 유사하다. 사랑은 빠질 땐 달콤하지만 헤어 나올 땐 쓰고 아리다. 그래서 토카이 와인은 반드시 아주 작은 글라스로 음미해야 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흠뻑 나를 적시는 커다란 글라스 보다는 작지만 서로를 완전히 볼 수 있는 투명하고 작은 글라스로 조금씩 서로를 음미할수록 사랑이 주는 달콤한 행복의 상미기간도 길어진다.

마음이 가라앉은 날, 잔뜩 흐린 하늘 아래 나만 우울로 허우적거리는 것만 같다면 큰마음 먹고 헝가리의 황금빛 토카이 와인을 들이자. 물론 토카이 와인을 마시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일에 책임은 질 수 없지만.

포스터=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
포스터=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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